퇴계 이홍선생이 내원하여 심은 느티나무
고산서당
퇴계, 우복 두 선생의 강학유허비
퇴계 이황선생과 수성구 고산서당 느티나무
대구, 경북은 물론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선비로부터 왕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심은 나무를 만나 보았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존경 받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수식목을 발견하지 못해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선생은 나무 중에서 특히 매화를 사랑해 매화를 소제로 한 시 107수를 쓰셨는데 따로 91수를 모아 매화시첩을 남겼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고 할 만큼 나무를 사랑했던 분이자, 단양의 관기 두향과 얽힌 애틋한 매화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에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뜻밖에 대구에서 선생의 수식목을 발견하는 행운을 가졌다. 1972년 내무부가 펴낸 <보호수지>에 수성구 성동 고산서당에 선생이 심은 느티나무가 있다고 등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감 이헌소(李憲昭)가 건립한 선생과 우복 정경세의 강학비를 보고 경내의 큰 느티나무를 골라 한 그루는 ‘이황나무’로 또 다른 그루는 ‘정경세나무’로 명명한바 있었다. 이름 난 학자나 유명 인사를 초청해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지금도 쉬운 일이 아닌데 16세기 교통이 불편했을 뿐 아니라, 조정에 출사하거나 저술, 강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선생을 모신다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대구는 예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안동이나, 예천, 봉화, 영주 등과 달리 직계 제자도 계동 전경창 이외 이렇다한 사람이 없었다. 형편이 이러한데도 선생이 심은 나무가 대구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선생이 남쪽지방을 여행한 사실은 여러 번 있으나 대구에 들렀다는 기록은 없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특히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의 편액이나 발문(跋文)도 매암 이숙량이 예안에서 받아온 것이라고 한다) 다음(daum)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선생의 생애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등이다.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주역〉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 중 전임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서적·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그 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서명 西銘〉 등을 진강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선조2)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고산서당은 조선 1560년(명종 15) 지역의 유림들과 경산현령 윤희렴(尹希廉)이 짓고 선생에게 강학을 청하자 이에 응해 주시고 편액을 ‘고산(孤山)’으로, 문액은 ‘구도(求道)’라고 써 준 곳이다. 임란으로 소실된 것을 1697년(숙종 23) 중수하여 고산서원으로 개칭하여 선생과 우복 두 선생을 배향하였고, 1734년(영조10)에 강당 및 동·서재를 완공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 훼철되었다.
1879년(고종16)에 이르러 지역의 선비들을 중심으로 강학계(講學契)를 조직하여 강당을 중건하고 ‘고산서당’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생의 수식목을 만나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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