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무안박씨 영덕 무의공파종택과 박선의 회화나무

이정웅 2012. 11. 2. 07:47

 

 박선이 수식한 회화나무

 무의공 종택 안채

 사랑채

 무안박씨 영해파 세거지 표석

 

 

 

 

 사랑채 누마루

 무의공 사당

현판

 

무안박씨 영덕 무의공파종택과 박선의 회화나무

 

 

동해를 접하고 있는 경북 영덕에 서해를 접하고 있는 전남 무안을 본관지로 하는 무안 박씨들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조금은 의아했다. 특히, 이들은 임란 등 나라가 위급할 때 국난극복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예안의 진성이씨는 물론 영덕지역의 재령이씨와 영양 남씨 등과 혼인을 통해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시조는 고려조 국자좨주(國子祭酒, 대제학의 별칭)를 지낸 박진승(朴進昇)이다. 나라에 공을 세워 무안(務安)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관향으로 삼은 집안이다.

영덕에 처음 자리 잡은 사람은 박지몽(朴之蒙, 1445~1555)으로 큰 아버지 박이(朴頤)가 영덕 현령으로 부임할 때 종사관으로 따라 왔다가 영해 박씨인 함길도사 박종문(朴宗文)의 딸과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창수 인량리에 정착한데서 비롯된다.

3남 영기(榮基) 대에 이르러 가문이 빛나기 시작했는데 아들 셋 즉 세현, 세렴, 세순 3명이 무과에 급제하고, 세렴의 두 아들 의장(毅長, 1555~1615)과 홍장(弘長, 1558~1598 )형제가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고위공직에 진출하면서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특히, 임란 때 공을 쌓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된 의장은 어려서 퇴계의 제자 김언기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웠다. 그러나 1577년(선조 10) 무과로 급제했다. 당시 시험관 강신은 역사와 병서에 관한 거침없는 공의 답변을 듣고 장차 대장감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진해현감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591년(선조 24)경주 판관이 되었다. 이듬 해 임란이 발발하자 병마절도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을 구하기 위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이각이 퇴각하고 박진(朴晉)이 병마절도사로 파견되자, 장기군수 이수일(李守一)과 함께 박진을 도와 적에게 빼앗긴 경주성의 탈환작전에 당시 최첨단 무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 4월에는 군사 300여명을 거느리고 대구 파잠에서 왜적 2, 000여명을 만나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빼앗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5월에도 울산군수 김태허(金太虛)와 함께 울산의 적을 쳐서 50여명을 베는 등 크게 이겨 당상관으로 특진되면서 경주 부윤이 되었다.

1594년 2월 양산의 적을 무찔렀고, 3월에는 임랑포(林浪浦)의 적이 언양현에 진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이를 급습하여 무찔렀다. 이때 적에게 잡혀 있던 백성 370명을 구해냈으며 우마 32필도 노획하였다. 5월에는 기장(機張)에서, 7월에는 경주에서 많은 왜병을 베어 그 공으로 가선(嘉善)으로 승품되고, 1597년 영천과 안강의 적을 무찔렀다. 이때 1,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명군 5만 명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적군이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치자 창고에 있던 곡식 400여석을 거두었다. 1598년 울산성 전투에 공을 세워 전마 1필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성주목사 겸방어사가 되고, 1600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11년 인동부사, 1612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듬 해 공홍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14년 경상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다섯 차례의 병사를 지내는 동안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같았다.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영해의 구봉서원에 제향 되었다.

입구(口)자형 47칸 큰 규모의 도곡리 종택(경북 민속자료 제74호)은 1644년(인조 22) 공의 4남 선(璿)이 맏형 유(瑜)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불천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공간이고,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할 종손의 품위가 유지되도록 배려(?)한 것이겠지만 부모가 물려준 작은 유산을 두고도 형제가 싸움으로 갈라지는 지금의 세태를 보면 이 종택은 남다른 우애가 서린 집이다.

사당 안에 1그루, 바깥마당에 1그루 2그루의 회화나무가 있어 연로한 종부께 물었더니 집을 지은 선(璿)이 심은 것일 거라고 했다. 무신(武臣)인 할아버지, 아버지와 달리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유학을 가르쳤던 그가 선비를 상징하는 이 나무를 수식한 것 같다.

아울러 종부는 지금처럼 왕성하게 자라지 않을 때는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나무가 생기를 얻으면서 후손들의 하는 일도 잘 된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종택 안채에 있는 석류나무가 생각났다. 석류나무는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활동이 많은 안채의 뒤 안에 주로 심는다. 그런데 이 집은 안마당에 심었다. 영남지방 반가의 경우 대개 입구 口자형인데 집안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이 관례다.

네모 안에 나무(木)를 심으면 곤할 곤(困)자가 되어 가난해 진다는 속설이 있다. 선조들이 자손을 많이 두라는 배려에서 심은 나무이기는 하겠지만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좋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