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광주인 문익공 이원정과 칠곡 귀암고택의 나무들

이정웅 2012. 10. 27. 07:27

 

본관이 광주로 조선 후기 형조, 이조판서를 지낸  문익공 이원정이 심은 향나무 태풍 볼라벤으로 가지가 찢어졌다.

 가지가 찢어지기 전의 아름다운 모습

 귀암 이원정의 종택

 

 

 

 

 

 

향나무와 함께 심은 회화나무 

 

 

 

 배롱나무

향나무, 회화나무, 배롱나무는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광주인 문익공 이원정과 칠곡 귀암고택의 배롱나무

 

17세기 송시열 등 서인의 전횡에 맞서다가 희생된 귀암 이원정이 심은 나무를 찾아가기에 앞서 칠곡파 광주 이씨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공의 할아버지 석담 이윤우, 아버지 낙촌 이도장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명문 광주 이씨가 처음 칠곡에 터를 잡은 곳은 지천면 웃갓(上枝)이라고 한다. 좌통례 이극견(李克堅)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책실(冊室)로 따라온 둘째 아들 지(摯)가 토호인 영천인 최하(崔河)의 사위가 되면서이다. 그 후 광주이씨는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 ~1634)에 의해 그 기반이 다져졌다.

석담은 조선중기의 성리학자 한강 정구의 고제로 칠곡파 최초의 문과(文科) 급제자다. 예문관 검열, 시강원설서, 홍문관수찬, 교리, 성균관 사성(司成) 등을 역임하고 1631년(인조 9) 공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저서로는 <석담집>이 있고 칠곡 사양서원, 성주 회연서원 등에 제향 된 분이다.

특히, 담양부사 재직 시 선정을 펼치고, 학문을 크게 진작시켜 고을 사람이 세운 청덕비와 흥학비가 있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몸이 불편한 공을 위해 담양사람들이 이곳까지 와서 허물어진 담을 쌓아주니 후일 사람들이 ‘담양담’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있다.

공은 아들로 도창(道昌), 도장(道長), 도장(道章)을 두었다. 이들 중에서 둘째인 낙촌 이도장(李道長, 1603~1644)이 당숙 이영우에게 출계(出系)하니 이가 곧 귀암의 아버지이다.

낙촌 역시 아버지 석담에 이어 1630년(인조 8) 문과에 급제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시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호종하고 수습책을 논의하며 크게 신임을 받았다. 이 때 청(淸)은 척화를 주장하든 신하의 명단을 요구했는데 영의정 김류가 8명을 제출했으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명만 적어 희생자를 줄였다. 이들이 청나라에 끌려가 처참하게 희생된 것을 감안하면 공의 판단이 매우 옳았음을 알 수 있다. 1638년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에, 청나라가 요청한 군사 파견을 앞장서서 막았다. 몸이 좋지 않아 외직을 자청,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낙향했다 이때 인조가 어의(御醫)와 약을 여러 번 내려 보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644년 (인조 22)사망했다.

왜관읍 석전 즉 돌밭은 웃갓, 매원에 이어 광이의 세 번째 터전이다. 귀암 아내의 아버지 벽진인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이 살던 곳이다.

1652년(효종 3) 공 또한 문과에 급제했다. 즉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이후 공의 아들 담명, 한명의 급제로 4대가 됨)가 연이어 대과에 급제한 것이다. 도승지, 대사간 등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때까지 유보되었든 영남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성사시켜 조세 부담을 경감시켰고, 대사헌을 7회나 역임했다. 대사헌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 오늘날 검찰총장의 자리와 같은 것을 감안하면 공은 사생활에서는 물론 공직에서도 청렴결백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된 사건)으로 초산에 유배 가던 도중에 불려와 비참하게 장살(杖殺)당했다. 이후 영남 남인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200여 년 동안 집권 서인의 조정으로부터 차별을 받아 요직에 중용되기 어려웠다. 1689년(숙종 15)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귀암문집>이 편저로는 <경산지 京山志>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현재 귀암고택은 종손 이필주씨가 지키고 있다. 조선(祖先)의 유지를 받들며 최근에는 퇴락했던 집을 새롭게 단장했다. 고택 후원에는 귀암이 매원에서 이곳으로 이거해오면서 집을 짓고 1671년(헌종 12)에 심은 향나무, 배롱나무, 회화나무가 있다.

용이 승천하는 모양의 향나무가 몇 년 전 태풍으로 끝 부분이 부러진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상태가 양호하다. 향나무는 송죽과 같이 절개를 뜻하고, 회화나무는 벼슬이나 학자를, 배롱나무(紫微花)는 한림(翰林)을 상징하는 것을 생각하면 공은 후손들이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심은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나무 한 그루 남긴다는 것은 백 마디 말 보다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들 3형제 중 담명(聃命), 한명(漢命)이 문과에 급제했다.

특히, 담명은 경상도관찰사 재직 시 구휼이 시급한 백성들을 위해 낙동강을 통해 서울로 올라가던 세곡선(稅穀船)의 곡식을 왕의 허락도 받지 아니하고 도민에게 나눠 줘 그 현명한 조치가 목민관의 표상이 되었고, 한명 또한 예문관 검열로 보임을 받았으니 석담에 이어 4대가 연이어 한림을 맡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귀암고택 가까운 곳에 이도장, 이원정, 이담명 삼대를 기리는 품(品)자형의 재사 동산재(東山齋, 경북도문화재자료 제503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