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의성인 사우당 김관석과 성주 윤동의 대나무

이정웅 2012. 11. 12. 08:20

 

 

 

 

의성인 사우당 김관석과 성주 윤동의 대나무

 

사우당 김관석이 심은 대나무

사우당

사우당 종택 사랑채

사우당 종택 안채

사우당 유허비

영모당

종택 소슬대문

원모재

원모재 태화문

문절공 사적비

문정공을 기리는 사당 세덕사

 

종가(宗家)의 사전적 의미는 ‘한 문중에서 맏아들로만 이어 온 큰집’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겉으로 들어난 의미 이외에 조상을 받들고, 일가 구성원의 화목을 도모하며,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하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점을 가지고 있는 종가들도 산업화는 비켜 갈 수 없어 젊은이는 대처로 나가 빈집으로 남아 있거나 늙은이만 지키고 있는 집이 허다하다.

그러나 성주 윤동(倫洞)의 사우당 종가는 달랐다. 적지 않는 나이지만 종부가 ‘선비문화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도시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윤동이 의성김씨의 집성촌이라는 것은 마을 초입에서 알 수 있다. 처음 마주 하는 큰 건물이 문절공 김용초(金用超, ?~1406)를 기리는 원모재와 세덕사다.

문절공은 고려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했으며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곧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다고 한다. 1390년(공양왕 2)에 왜구가 양광도(충청도)를 침탈하자 밀직부사로써 윤사덕, 이방과 등과 함께 도고산(道高山, 예산군과 아산시 사이에 있는 산)아래에서 왜구 100여 급(級)을 베어 전공을 세웠다.

조선 개국한 후 호남병마도절제사(都節制使)를 제수 받고, 가선대부(종2품)에 이르렀으며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졌다.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충신문(忠臣門, 경북 문화재자료 제502호)이 나온다. 순천박씨 성주입향조인 개성 판윤 박가권(朴可權)의 7세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의민공(毅愍公) 박이현(朴而絢)과 이괄의 난 때 순국한 그의 아들 충장공(忠壯公) 박영서(朴永緖)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692년(숙종 18)건립된 정각(旌閣)이다.

발길을 다시 더 안쪽으로 옮기면 윤호문(倫湖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솟을 대문이 나온다. 바로 문절공 김용초의 21대, 사우당 김관석의 15대 종가(경북 문화재자료 제561호)다.

첫 번째 만나는 건물이 사랑채, 다음은 안채, 사우당이 그 다음이고 맨 마지막 높다란 곳에 위치한 건물이 영모당이다. 네 채가 거의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점점 높아지는 지형을 활용해 밖에서 보면 매우 웅장해 보인다. 영남지방 반가의 집구조가 입 구(口)자 형이거나 디귿(ㄷ)자 형과는 다른 모습이다.

문화재청의 설명에 따르면 종택은 윤동(倫洞)마을 의성김씨 입향조(入鄕祖) 사우당(四友堂) 김관석(金關石, 1505~1542)을 추모하기 위해 1818년(순조 18)후손들이 창건하여 몇 차례 보수와 개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사우당(四友堂)은 조선 중종조의 학자로 품행이 독실하고 사서오경을 바탕으로 한 도의(道義, 사람으로 마땅히 행해야할 도덕이나 의리)를 익히고 닦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서당을 세워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독서명문도편(讀書銘聞道篇)>을 비롯한 유교철학과 관련한 적지 않은 저술과 사우당십경운(四友堂十景韻)을 남겼다. 조정에서 공의 어짊을 듣고 제릉참봉의 벼슬을 내렸으나 ‘부모가 계시는 집을 떠날 수 없다’하여 사양하였다. 사후 덕천서원에 제향 되었다.

공은 윤동마을에 세거하는 의성 김씨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한다. 특히 사군자로 통칭되는 매화, 난, 국화와 더불어 대나무를 벗한다고 하여 스스로 호를 사우당(四友堂)이라고 하고 주변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선비들이 굳이 사군자를 좋아 하는 것은 매화는 이른 봄, 눈이 채 녹기 전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고, 난은 깊은 산 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며, 국화는 늦가을 찬 서리를 이기고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속이 비웠을 뿐 아니라,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성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뜻 있는 선비들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큰 덕목으로 여겼던 데서 유래한다. 공 역시 은둔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과 제자들을 기르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공이 벗으로 삼고자 손수 심었던 매화, 난, 국화 등 사군자 중에서 남은 것은 종가 주변에 무성한 대나무뿐이라 아쉽다.

다만, 종부 류정숙 여사께서 사라져 가는 전통예절을 되살리고, 선조들의 다례문화를 보급하여 거칠어진 사람들의 심성을 계발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니 그 갸륵한 마음과 진한 다향(茶香)이 사우당 종택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