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정무공 잠와 최진립과 경주 충의당 회화나무

이정웅 2012. 9. 15. 06:27

 

 

 정무공 최진립이 심은 회화나무

 잠와고택 사랑채

 충노비각과 비

 잠와를 기리는 사당 충렬사

 잠와고택안채

 경주 교동경주최씨 고택 사랑채

 경주 교동경주최씨 안채

 잠와에게 내린 인조의 사제문

 잠와 고택의 경모각

 충노비각

수식 기념표석

 

정무공 잠와 최진립과 경주 충의당 회화나무

 

 

 

 

재벌가의 비리와 대가업의 사회공헌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비교되는 집안이 ‘경주최부자집’이다.

그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이유는 성취한 부(富)가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쓰임에 대한 철학이 개인의 영달보다 나라와 이웃을 돌봄에 큰 배려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선행이 당대에 한하지 않고 12대 300여 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1568~1636)이다.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무과에 급제해 정유재란 때 울산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1607년 오위도총부 도사(都事)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능창군 추대사건(선조의 서자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가 인조반정 후 복직되어 가덕 첨사(僉使)로 복귀했다. 그 뒤 경흥부사, 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가 되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했으며 1634녀(인조 11) 전라수사를 지냈다. 공주 영장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충청관찰사 정세규가 출정하면서 연로한 공에게 전쟁을 치르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고 참전을 만류했다. 그러나 용인 험천(險川)에 이르러 보니 공이 먼저 와 있었다. 정 감사가 ‘어찌 여기 왔소.’라고 물었더니 ‘임금이 포위를 당해 있고, 주장(主將)이 전장으로 나아가는데 어떻게 물러 나리요 또한 나라에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 주장과 같이 죽으러왔소’라고 대답하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잘 훈련된 청나라 군대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평소 그림자처럼 따르든 두 종 옥동(玉洞)과 기별(奇別)에게 ‘너희들 중에 나를 따를 사람은 이 옷을 받아 입어라’ 하고 옷을 벗어던지자 기별이 울면서 옷을 주어 입고 ‘주인이 충신이 되는데 어찌 종이 충노가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한 뒤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청백리로 뽑혔으며, 경주 용산서원 등에 제향 되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모 일간지 기자는 ‘모든 측면에서 다 훌륭한 인물은 드물다. 사회적으로 유능한 인물이지만 가정적으로 미흡할 수 있고, 청렴과 겸손을 갖추어도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 있는데 공은 그렇지 않다’ 고 했다.

 

 

1700년 경 후손들이 교동으로 이거하며 12대에 걸쳐 만석의 부를 유지하고 9대에 진사를 배출하여 여느 집안도 이루어내지 못한 명성을 얻었다.

경주 최문의 이러한 배품과 배려, 나라사랑정신은 시대를 초월한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TV나 신문은 물론 많은 언론 매체가 앞 다투어 소개하고 있다. 지금도 경주교동최씨고택(중요민속자료 제27호)에는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잠와로부터 12대 마지막 부자로 일컬어지는 최준(崔浚, 1884~1970)이 살던 종택에는 최 부자집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글이 있다.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가치는 없으며 좌우 치우침 없이 의롭게 산다.’

 

또한 집안을 다스리는 여섯 가지 교훈으로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마라, 둘째, 만석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주변 100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여섯째,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이며

자신을 지키는 여섯 가지 지침으로 첫째,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둘째,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셋째,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지니고, 넷째,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다섯째, 성공했을 때 담담하게 행동하고, 여섯째, 실의에 빠졌을 때 태연히 행동하라. 이다.

 

내남면 이조리에는 공이 살던 잠와고택 충의당(경북 민속지료 제99호)과 함께 전사한 충노를 기리는 충노각 그리고 공이 심어 최부자집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회화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다. 그러나 잠와의 이 살아있는 문화유산을 잘 관리한답시고 나무 주위에 축대를 쌓은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 생육을 나쁘게 하고 있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