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재령인 운악 이함과 영덕 충효당 은행나무

이정웅 2012. 9. 7. 22:26

 

 

 운악 이함이 심은 은행나무

 

 충효당

 

 충효당 사랑채

 

 사당 앞의 회화나무, 동쪽의 가지가 무성하면 영해쪽의, 서쪽 가지가 무성하면 석포쪽의 후손들이 번성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당 배롱나무가 무성하다.

 

 충효당 안채

 

 충효당 현판

 

 서쪽에서 바라 본 충효당

 

보호수 표지석

 

재령인 운악 이함과 영덕 충효당 은행나무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는 충효당(국가 민속문화재 제168)이라는 고색창연한 고택이 있다. “재령이씨 영해파 종택이다. 입향조 이애가 성종 대 지은 것을 손자 운악 이함(李涵, 1554~1644)1602(선조 35) 경에 완성했다고 한다. 당호 충효는 후손들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의 글씨라고 한다.

본관지가 재령인 그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린 것은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손자 영해 부사 율간(栗澗) 이중현(李仲賢, 1449~1508)16살의 조카 애(, 1480~1561)를 책실(冊室, 관아에 보관 중인 서책을 관리하는 사람 )로 데리고 왔는데 그가 영해지역의 호족인 진성인 백원정(白元貞)의 무남독녀와 혼인하여 1497(연산군 3) 이곳에 정착한 데 따른 것이다.

입향조 이애는 1515( 중종 10)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무안·함창 현감, 경주 판관을 거쳐 울진 현령을 지냈다. 재령이씨 영해파를 명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기초를 다진 분은 이애의 손자 운악(雲嶽) 이함(李涵)이다. 공은 1554(명종 9)에 태어났다. 당대의 석학, 황응청(黃應淸, 1524~1605)에게 수학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향시에 여러 번 나아가 명성을 높였으며 학봉 김성일 형제와 깊은 사귐이 있었으며 1558(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했다.

임란 중 순찰사 한효순이 군사를 거느리고, 안동에서 진보로 가는 중 군량미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수십 석을 보내 군의 사기를 높이자 공에게 동해의 염장(鹽場)을 관장하여 군량미를 조달케 했는데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하였다.

전란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기근까지 겹쳐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나자 집안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는 도토리를 주워와 죽을 끓여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접하느라고 부인 진성이씨와 며느리 장씨(훗날, 여중군자로 칭송받는 장계향)의 손에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1599(선조 32) 체찰사 이원익의 천거로 김천도(金泉道) 찰방(察訪)으로 나아가 피폐해진 고을을 안정시켰다. 이웃 성주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원군의 군량미 조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수령이 직무를 기피(忌避)하고, 고을 사람들은 숨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을 책임자로 임명하니 이 난제 역시 성공적으로 수습했다. 1600(선조 33) 문과에 급제했으나 책문에 장자(莊子)를 인용했다는 이유로 낙방했다.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대의 희생양이다. 그러나 1609(광해군 1) 다시 응시하여 합격하니 두 번이나 급제하는 이례적인 기록을 보유한다.

1603(선조 36) 의금부 도사(都事), 사재감(司宰監) 직장(直長), 주부(主簿)로 자리를 옮기며 가는 곳마다 공무를 혁신했다. 1607(선조 40) 의령 현감으로 나아가 백성을 보살피는 한편 허물어진 향교를 재건하고 바쁜 공무 중에도 틈틈이 소학과 사서를 강론하는 등 학문을 진흥시켰다. 1609(광해군 1) 두 번째 급제했으나 당파 싸움으로 세상이 혼란 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632(인조 5) 세상을 뜨니 향년 79세였다. 훗날 손자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남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이조판서에 오르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선대로부터 많은 전지를 물려받아 여유가 있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자손들을 위해서도 정성을 기울여 만권서루(萬卷書樓)를 만들었으며 글씨 쓰는데 필요한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 수십 마지기의 밭에 닥나무를 심어 종이를 생산했다고 한다.

종택의 서쪽에 자리한 거대한 은행나무는 공이 직접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행단(杏壇)을 빗대 후손들이 학문을 성취하고 무수한 가지처럼 번창하라는 뜻을 담았을 것이다. 이 염원은 그리 머지않아 이루어지니 아들 이시명(李時明), 손자, 이현일(李玄逸) 증손자 이재(李栽)로 이어지는 퇴계학파의 정통을 계승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전국에서 가장 큰 유림 단체인 박약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이용태(李龍兌) 회장이 공의 19대 종손이다.

5세기에 가까운 나무의 나이나, 심은 이가 지역사회와 나라에 끼친 공적을 고려한다면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로 대접받음이 마땅하나 군()의 보호수에 그치고 있어 아쉽다. 사당(祠堂) 바로 앞에 동서로 가지를 뻗은 회화나무가 있다. 좁은 공간에서 잘 자라는 것도 신기하지만 동쪽 가지와 잎이 무성하면 영해 쪽의, 서쪽 가지와 잎이 무성하면 영양 쪽의 자손에 경사스러운 일이 많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