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금당실의 수문장 사괴당 느티나무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金堂室)은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의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격암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전국의 십승지 중에서 다섯 번째로 금당실을 지목했다. 그는 또한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임란 7년 동안 우리나라 곳곳이 유린되었지만 이곳은 안전했다고 한다.
마을 곳곳에 고인돌이 있어 청동기시대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을 도읍지로 하려다가 물이 부족하여 그만두어 서울이 되다가 말았다하여 ‘반서울’이라 하고, 인물이 많이 나서 서울에서 찾아 온 선비들로 마을이 북적거려 ‘반서울’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오미봉에서 용문초등학교까지 약 0.8km의 울창한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이 장관을 이룬다. 보기도 아름답지만 수해로부터 마을이 안전하도록 하고, 바람을 막아 생활에 불편함이 덜 하도록 한 호안림(護岸林) 또는 방풍림(防風林)이다. 나무를 베는 사람을 우물에 빠뜨리는 벌칙이 있었다고 한다. 동학란으로 사회가 혼란할 때에 벌채가 심했으나 1898년(고종 35) 법무대신 이유인(李裕寅)이 보호에 앞장서서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는 금당실에 99칸의 저택을 짓고 유사 시 고종황제를 이곳으로 모시려 했다고도 한다.
마을은 600여 년 전 감천 문씨가 개척했다고 한다. 입향조의 손자 사용교위(司勇校尉) 문억경(文抑磬, 금당실 마을 홈페이지에는 문부경으로 되어있으나,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명단인 문과방목에 의하면 맏사위 박종린의 처(妻)의, 아버지 이름이 문억경으로 되어 있음.)은 아들이 없고 두 딸만 있었는데 각기 함양인 박종린(朴從麟, 1496~1553)과 원주인 변응녕(邊應寧, 1518~1586)에게 출가시켜 그들이 처의 고향에 자리를 잡으면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마을이름 금당실은 마을 앞 금곡천에 사금(砂金)이 생산되어 ‘금당실’ 금당곡, 금곡이라 했다는 설과 동쪽은 옥녀봉, 서쪽은 국사봉, 남쪽은 백마산, 북쪽은 매봉이 조산이 되어 소백산이 내룡(來龍)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연못을 상징하여 ‘금당실(金塘室)’이라 했다는 설과 중국의 양양 금곡과 닮아 ‘금곡(金谷)’이라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고택과 살림집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서원, 재실, 등 옛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마을의 자랑거리인 돌담길은 미로처럼 연결되어 물물교환시대 새우젓 장수가 이고 온 새우젓을 다 팔고 대신 쌀이나 보리로 수금을 했는데 비슷한 길이라 돈 받을 집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최근에는 영화 영어완전정복(2003), 나의 결혼원정기(2005), 그해 여름(2006), KBS 드라마 황진이(2006) 등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마을의 상징인 오미봉 아래에는 고려후기의 문신 박충좌(1287~1349)와 함양 박씨 입향조 박종린의 아버지로 아들 5형제를 모두 대과에 급제시킨 박눌(1448~1528), 조선후기 성리학자로 안동의 대산 이상정, 대구의 백불암 최흥원과 더불어 영남3노(嶺南三老)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남야 박경손(1713~1782)을 기리는 금곡서원이 있다.
개척 당시 금당실은 함양박씨와 원주변씨가 주도했던 것 같으나 현재는 함양 박씨 35%, 원주 변씨 10%, 기타 성씨가 55%로 타성바지들이 많이 살고 있다.
문(文) 교위의 두 사위 중 박종린은 1532년(중종 27) 문과 급제한 후,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으나 변응녕에 대해서는 사위 이희(李熹, 1532~1592)가 1574년(선조 7) 문과에 급제 관직에 진출하여 임란 시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다가 전사한 것 이외 본인의 벼슬이나 학문적 업적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용문면사무소 앞에 있는 큰 느티나무는 그가 심은 것으로 전해 온다. 원래 4그루를 심었는데 3그루는 죽고 현존하는 것은 남은 1그루라고 한다. 종가 사괴당(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337호)의 사괴(四槐)는 4그루의 느티나무를 뜻한다.
이곳 출신이자 용문초등학교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임학계의 태두인 임경빈 박사는 원주 변씨의 예천 입향조이자 변응녕의 증조(曾祖)인 귀계(歸溪) 변희리(邊希李, 1435~1506)가 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귀계는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 형조좌랑으로 있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한 분이다.
그러나 변응녕이 집의 당호(堂號)를 사괴로 한 것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 때 사괴당이 심은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고, 문헌 상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귀계가 심었던 사괴당이 심었던 명문 원주 변씨들이 예천 금당실에 남긴 살아 있는 문화유산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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