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간종택입구의 울향
죄측의 종택 안채와 별당 대소헌
육지사람들이 울릉도에 왔다가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다는 대풍감
초간정(명승 제51호)
초간정에서 한 때
예천인 권오상과 죽림리 초간종택의 울릉도 향나무
권(權) 씨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알고 있으나 그와 달리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대수마을)에는 예천 권씨와 그 후손 초간 권문해의 종택(중요민속문화재 제201호)이 있다. 조선 전기 영남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주택일 뿐 아니라, 대학자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할아버지 권오상(權五常)이 지은 별당(보물 제457호)과 초간의 저서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보물 제878호)>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다. 그곳 마을 초입에 큰 향나무가 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나무는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노목으로 높이 10m, 가슴높이둘레가 0.6m이고, 이 지방에서는 울향(鬱香)이라 부르는 나무이다.
이 나무를 울향나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울릉도에 유배당했던 권오상(權五常)이 가져와 연못가에 심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향나무는 처음에 심은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대수 마을과 영고성쇠를 함께하고 있다.’
이 안내문을 보고 몇 년 전 울릉도 스토리텔링개발에 참여한 바가 있던 필자로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때에 본 어떤 사료에도 울릉도가 유배지였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토방위의 최동단(最東端) 전초기지이자 수산물과 식물자원의 보고인 울릉도는 최근에는 다소 나아졌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문제의 땅이었다. 수시로 수토관(搜討官)을 파견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 육지로 데려오는 한편 섬을 무인도로 비워두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펼쳤다.
따라서 권오상이 울릉도에 유배되었다는 안내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다시 <울릉군지> 등을 뒤져보았으나 별다른 사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권오상이 특별한 역할이 없어서 그런지 사화 피해자 중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엄청난 피화에 오형제 중에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 셋째 아들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이 김일손 등과 능지처사(陵遲處死)되고, 수헌의 바로 위 형 졸재(拙齋) 권오기(權五紀)가 해남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이런 의문은 그 후 다시 죽림리를 찾았을 때 문화재해설가 박희식님에 의해 해소할 수 있었다. 그는 권오복의 연좌(連坐)로 막내인 권오상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고 했다. 아! 그렇다면 실마리를 풀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도 강진은 경상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울릉도와 교류가 잦았든 고장이다.
그렇다면 그 곳 사람들이 울릉도에 갔다 오는 길에 향나무를 가져왔을 것이고, 유배 중이었던 권오상은 그들이 가져온 향나무를 얻어 와서 심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도 강진은 물론 육지의 일부 어민들은 선령(船齡)이 다한 헌배를 가지고 울릉도에 가서 그 곳의 울창한 산림을 벌채해 새로 배를 만들어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갔다는 서면의 대풍감(待風坎) 이야기라든지, 독도(獨島)의 어원이 남도의 사투리 석도(石島 즉 돌섬)에서 비롯된 점과 1882년(고종 19) 수토관으로 검찰관 이규원을 파견되어 그가 돌아와서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보다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
이규원(李奎遠, 1883~1901)의 보고서 “울릉도검찰일기”에 의하면 당시 울릉도에는 조선인 141명과 일본인 78명이 살고 있었다. 조선인 중에서는 전라도 출신이 115명으로 82%를 차지하고, 경상도 출신은 11명으로 8%였다 이 일기를 통해 130여 년 전 울릉도에는 상당수의 일본인들과 남도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는 강진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권오상은 울릉도에 유배되지 않았더라도 그들을 통해 울릉도 향나무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륙 깊숙한 곳 죽림리 향나무는 이런 연유를 간직한 해풍을 맞고 자란 나무일 것이다. 수령이 300년이라고 하니 권오상이 연산군 대의 16세기 인물임을 감안하면 당초 가져온 나무는 죽고 그 둥치에서 새로 싹이 돋아 자란 것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명문 예천 권씨는 원래 예천의 토성으로 흔(昕)씨였으나 당시 국법에 의해 고려 29대 충목왕(忠穆王)의 이름 흔(昕)을 피하여 외가 성인 권씨(權氏)으로 개성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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