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권씨 신녕 입향조 구의헌 권열이 심은 느티나무
구의헌을 기리는 모선재
나무 유래비
후손 권응도를 기리는 풍영정
구의헌 권열의 유허비
풍영정 현판
시안미술관
구의 절목
안동 권씨 신녕 입향조 권열과 영천 가상리 느티나무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는 폐교를 활용해 만든 시안미술관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전통마을의 고택과 재실, 서원 등을 연계시켜 ‘영천별별미술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한적하기 그지없던 시골마을이 도시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이곳은 안동 권씨 구의헌(九宜軒) 권열이 개척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경상도지방은 숭조사상이 깊은 곳이라 마을 곳곳에 고색창연한 고택이나 재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거주해야 닦고 쓸어 집에 생기가 넘치는데 대개의 경우 비어있어 관리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심지어 마음먹고 먼 길을 찾아가도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비해 대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어 헛걸음을 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곳은 다르다. 마을 곳곳에 숨겨진 미술작품을 찾아가다보면 고택이 보이고 고택을 구경하다보면 미술작품이 눈에 들어와 사람들로 붐비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사업은 젊은이가 떠난 우리 농촌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공한다.
마을 한 복판에는 입향조 구의헌이 심는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여느 나무와 달리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나무의 유래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500여 년 넘는 것으로 안동 권씨 신녕 입향조인 구의헌 권열(1424~1507)공께서 조선 연산군 2년(1496) 광주목사 재임 시 연산군의 난정을 직간하고 안동으로부터 송곡리(松谷里) 은거하여 살면서 심었으리라 추정되는 것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이 나무 아래서 시와 학문을 강론하고 예절과 활쏘기를 익혔음은 아마도 공자님의 유풍에 힘입었을 것이리라. 임진왜란을 당하여 동당(同堂)의 형제숙질들이 여기에서 창의하여 이름이 청사에 올랐으며 그 가운데서도 화산군 권응수(1546~1608)공이 가장 두드러졌지만 아무도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음은 모두 이 나무를 보호하는 뜻에서 예의와 사양하는 가풍을 얻었을 것이다.
창의는 예의에서 발휘되고, 무공은 활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훗날의 자손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절문(節文)하며 여기에서 덕행을 보게 된다면 곧 구의헌공께서 후손들에게 내려 주시는 두터운 그늘이 더불어 모두 크다 할 것이다.
후일 공의 현손 성균생원 풍영정(風詠亭) 권응도(1616~1674)공이 이 나무 이름을 풍영정이라 하고 자신의 아호 또한 이것으로 하여 나무 주위에 배근축석(培根築石)하여 때때로 관동(冠童)들과 함께 시 읊고 습례(習禮)하였다고, 기술(1669) 되어 있다.
계미년 단양절 후손 권범락, 권혁민, <풍영정일고>를 고증하여 삼가세우다. 라고 설명해 놓았다.
구의헌은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의 18세손으로 9형제 중 7째로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465년(세조 10년)에 문과에 급제해 지평을 지내다가 1496년(연산 2년) 광주 목사로 있을 때, 연산군의 학정을 극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이곳으로 옮겨와 은거했다.
공은 새로 터를 잡은 영천에서 효도, 충성, 공경, 신의, 인, 의, 예지, 산림경영 등 소위 아홉 가지 지켜야 할 규칙 즉 구의절목(九宜節目)으로 스스로 실천하며 행동의 지침으로 삼아 자호(自號)로 하고 후손들 역시 입향조의 이러한 뜻을 받들어 바른 삶을 살게 되니 이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특히 임란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어려웠을 때 후손 중 운(雲), 덕시(德時), 응평(應平), 치렴(致廉) 등 23명이 의병으로 참가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그 중 의병장 응수는 격전 끝에 영천성을 수복하여 관군은 물론 의병들의 사기를 높이고 경주, 울산, 문경 등 영남지방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워 김시민 등과 함께 선무공신(宣務功臣) 2등에 서훈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선조로부터 ‘몸은 조자룡의 담(膽)이오, 용모는 허원(許遠, 당나라 현종 때 무장 안녹산의 난을 막음)과 같다.’는 칭찬을 들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의 현손인 응도는 가학으로 성리학, 역학을 공부하고 인문, 지리에 통달했다. 1662년(현종 3)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공은 입향조 구의헌이 심은 느티나무를 풍영정이라 하고 자호로도 삼았다. 청송의 유학자 조함세(趙咸世)는 ‘신녕 고을의 문운(文運)은 공이 일으켜 세웠다’고 했다.
저서로 <심성요록> <만고천자문> <풍영정일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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