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진성인 온계 이해와 안동의 밤나무

이정웅 2013. 6. 19. 09:12

 

 조선 중기 문신 이해가 심은 수령 500여 년의 밤나무

 온계 이해의 종택 삼백정

 온계종택 안채

 보호수 표지석

 온계 구거 현판

 종택 전경

온계가 태어난 본가 노송정

 

 

 

 

밤나무는 재배한지가 오래된 나무임에도 노거수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에 있는 것이 수령 600년으로 높이가 14m, 지름이 203cm가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자 유일하게 천연기념물(제498호)로 지정된 나무이다.

밤나무가 오랜 유실수라는 것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원효불기(元曉不羈)’ 조에 의하면 ‘스님의 아버지 담내(談㮈, 삼국사기에는 담날, 談捺)는 압량군(지금의 경산시) 남쪽 불지촌 사람이었다. 만삭이 된 아내가 어느 골짜기를 지나가다가 밤나무 아래서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었다. 이 때 같이 가던 담내가 옷을 나무에 걸고 산모를 돌보아 태어난 아이가 원효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사라수(紗羅樹), 열매를 사라율(紗羅栗)이라고 불렀다. 어느 절의 주지가 종자(從者)에게 하루 끼니로 밤 두 알을 주자 그 종자는 관청에 소송을 제기했다. 관리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밤알 하나가 밥그릇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다.’고 한다.

영남일대에 폭염주의보가 내려 질 만큼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든 날 안동 도산 온혜로 향했다. 수고 12m, 지름이 175cm로 비록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평창의 밤나무에 비해 크기나 굵기가 뒤지나 조선 중기의 문신 정민공 이해(李瀣)가 심었다는 수령 500년의 밤나무가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고 꽃이 필 이때를 기다려 찾은 것이다.

 

공은 1496년(연산군 2)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온계(溫溪)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 우(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종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정언 등 요직을 거쳐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중종 39)에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그해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이었던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발탁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명종 2)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명종 4)에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명종 5)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소윤과 대윤의 대립문제를 지적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김안로가 인근에 살아 그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그마저 거절했다.

그러나 명종이 공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곤장 100대에 갑산에 귀양 보내는 것에 그쳤으나, 1550년(명종 5) 귀양 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니 향년 55세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금부 심문관이었던 윤원형으로부터 가장 혹독한 화를 입었다고 했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 안동의 청계서원에 배향되었으나 뒤에 훼철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버스에서 내려 공과 아우 퇴계가 태어난 노송정으로 향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방문객이 한사람도 없었다. 태실을 둘러보고 새로 복원한 온계 종택으로 행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온계가 심은 밤나무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큰 나무가 들 복판에 서 있다.

종택은 1516년(중종 11)공의 나이 20세, 분가할 때 지었다고 하니 밤나무도 이 때 심은 것으로 보인다. 공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퇴계가 어머니를 모시고 5년 간 살았다고 한다. 그 후 12대손 지암 이인화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이에 반발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자 관군이 방화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11년 복원했다고 한다.

공이 많은 나무 중에서 특별히 밤나무를 심은 것은 앞산이 지네를 닮아 상극인 밤나무로 독기를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