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파평인 아암 윤인협선생과 영벽정 회화나무

이정웅 2014. 4. 15. 07:54

 

 

 

 

영벽정과 회화나무 

 

 

 영벽정 현판

 문산월주의 무대 낙동강

 파평 윤씨 문산  세거표석

파평 윤씨 문산 세거 유래 안내판

 

파평인 아암 윤인협선생과 영벽정 회화나무

금호강을 동쪽에 낙동강을 남쪽에 두고 있는 다사는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수량으로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한 살기 좋은 곳이자 삼국시대에는 대가야와 국경을 마주한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경관 또한 수려해 선사일대는 고운 최치원을 비롯해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등 원근의 이름 난 선비들이 뱃놀이를 즐겼던 곳이고 다사팔경(多斯八景)도 있다.

제1경 선사조기(仙槎釣磯, 선사에서 낚시 놓기), 제2경 마령청람(馬嶺靑嵐 멀리서 보이는 마령의 푸르스름한 기운), 제3경 낙강모범(洛江暮帆 낙동강에서 해질녘 돌아오는 돛단배), 제4경 봉대석화(烽臺夕火, 마천산 봉화대의 저녁 불빛), 제5경 금호어적(琴湖漁笛 금호강에서 들려오는 어부들의 파리소리), 제6경 방천철교(坊川鐵橋, 방천리 금호강 위를 지나가는 경부선 철교), 제7경 문산월주(汶山月柱, 문산의 달그림자), 제8경 강정유림(江亭柳林, 강정의 버드나무숲) 이 그것이다.

20세기에 개통된 경부선철도가 등장하는 등 제정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는 것 같으나 특히 제7경의 문산월주는 영벽정(映碧亭)과 관계되는 선비들의 선유(船遊)문화를 엿 볼 수 있는 특별한 경관이다.

이 정자는 1573년(선조 6) 아금(牙琴) 윤인협(尹仁浹, 1541~1597)이 세웠다.

강가의 갈대꽃이 붉게 물든다하여 (실제는 회갈색)처음에는 영홍정(映紅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백구(白鷗)가 무리지어 노닐자 다시 영백정(映白亭)으로 바꾸었고, 이들이 날아가고 푸른 물결만 넘실거리자 마침내 영벽정(映碧亭)으로 고쳐 부른 것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공은 참봉 윤응벽(尹應壁)의 아들로 1541년(중종 36) 서울에서 태어나 1568년(선조 1) 진사시에 합격했다.

본관은 파평으로 고려 예종 때 여진족을 정벌한 윤관 장군의 14대 손인 윤탕(尹宕)의 손자다.

윤탕은 상주목사로 재임(1524년)하던 중 경상도관찰사 성세창(成世昌)이 ‘송사를 바르게 하고 백성을 고르게 부린다’는 장계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은 훌륭한 목민관이다.

공은 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영남으로 내려와 산천을 유람하다가 장차 살만한 곳을 잡으니 오늘 날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이다. 이때가 1571년(선조 4)이다. 공은 이 곳을 거처로 정하고 두 해 뒤 영벽정을 짓고 그 소회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남으로 내려와서 경치 좋은 곳이 이 강가이니 南來形勝此江汀

늙어감에 천천히 쉬게 작은 정자를 지었네 老去捿遲築小亭

홀로 시서를 안고 한가히 쉰지 오래이니 獨抱詩書閒臥久

세상사 많은 의미 이 가운데 멈추네. 風煙多意箇中停

공은 당시 지역의 대표 문사였던 임하 정사철과 송계 권응인 등과 교유하였다. 임란 중에는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1597년(선조 30)돌아가시니 향년 57세였다.

저서로 <아암 실기>가 있다. 현재 공의 후손은 1,500여 세대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월주(月柱)는 달기둥이라는 자구적인 해석과 달리 물 흐름에 따라 흔들리는 기둥같이 생긴 달그림자를 말한다고 한다. 영벽정에서는 달밤에 만 즐길 수 있는 월주의 신비스럽고 황홀한 경관을 완상하기 위해 ‘적벽강유회(赤壁江遊會)를 열었다고 한다.

매년 음력 7월 17일 원근의 선비들 수 백 명이 모여 3일간 먹고 자면서 월주의 신비한 풍경을 즐겼다고 한다. 가장 크고 둥글다는 8월 보름달이 아니고 7월의 열이렛날이었다니 그 역시 특이하다.

낙동강 칠 백리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영남제일강산’ 영벽정은 그 후에도 임제 서찬규, 심석 송병순, 전양군 이익필, 낙애 정광천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겼다.

강정`고령보가 건설되면서 강물도 바다처럼 넓어졌다. 그런데도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영벽정의 오래된 회화나무만 옛 영화를 아쉬워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