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멜표류기에 등장하는 강진의 은행나무
복원 중인 강진병영
하멜을 상징하는 조각물
네덜랜드 풍차
고인돌을 들어올리며 자라는 은행나무
하멜(Hendric Hamel) 일행과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
남도답사 1번지 강진은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한 고장이다. 그러나 왕복 8시간이나 소요되는 대구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당일 코스로 선택한 곳은 3곳에 불과했다. 첫째는 다산초당이고, 두 번째는 영랑생가이며 다음은 성동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 385호)였다. 앞의 두 곳은 워낙 이름 난 곳이라 이미 가본 곳이고 은행나무는 초행이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을 보고 미리 예약을 해 둔 식당을 갔더니 푸짐한 반찬에 모두들 탄복을 했고 몇 분은 다음 올 때에 다시 이용하겠다며 명함을 얻어 가기도 했다.
영랑생가는 모란이 피어야 제격인데 그렇지 못했지만 평일인데도 학생들로 붐볐다. 아마 체험학습을 나온 아이들 같았다. 영랑은 대구사람들에게도 낯설지 않는 인물이다.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된 점, 민족 시인이라는 점, 대구형무소에 6개월 수감된 점 등이 이상화와 닮았기 때문이다. 특히, 2013년 이상화기념사업회와 영랑기념사업회가 교류 협정을 체결하여 양 도시를 오가며 두 시인을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성동리 은행나무는 강진읍에서 북동으로 14.8㎞ 떨어진 병영면 소재지에 있다. 이곳은 1417년(태종 17) 제주도와 호남방어를 총괄하는 육군 최고 지휘부 전라병영성을 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은행나무가 있다. 마을의 상징목으로 수령이 800년이며 수고 30m, 흉고둘레 6.75m의 큰 나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여름철 폭풍으로 크고 작은 가지들이 많이 부러졌다. 피해 상황을 보고 받은 전라병영성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종2품)는 큰 가지를 성안으로 가져오게 하여 관아에 필요한 무기와 가구를 만들게 하고 남은 가지를 가지고 베고 잘 목침(木枕)을 하나 만들었다. 그런데 그날부터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어떤 유명한 의원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굿)를 하고 점을 쳐보니 은행나무 가지로 목침을 만들어 사용한데 따른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목침을 다시 나무줄기에 붙어 주어야 병이 낫는 다고 하였다. 이에 무당의 말을 따라 하였더니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지금도 은행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목침이 들어있는 듯이 볼록해진 곳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이러한 전설 이외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1653년(효종 4)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베르호(Sperwer)의 선원 핸드릭 하멜(Hendric Hamel, 1630~1692)과 그 일행에도 관련이 있다.
그들은 표착 후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었다. 그 중 하맬을 포함한 일행 33명은 1656년 3월 ~ 1663년 2월까지 약 7년 동안 이곳 강진에 붙잡혀 있었다. 몇몇은 조선여자와 결혼도 했으며 나막신을 만들어 팔거나 광대 짓을 하거나 잡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나막신이 일본의 나막신과 달리 통으로 만들어진 것은 이들이 전래한 것으로 추측하며 현재 마을에 남아 있는 우리 전통 축조법과 다른 빗살무늬양식의 담장 역시 그들이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멜일행은 이 곳 은행나무 밑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다가 1663년(현종 4) 여수, 순천, 남원 등지로 분리 이송되었다. 그 후 1666년(현종 7) 9월 조선관군의 감시 소홀을 틈타서 마침내 일본으로 탈출 하는데 성공했다.
훗날 그들은 이 조선에 억류된 이야기를 담은 <하멜표류기>를 저술함으로써 동아시아 작은 나라 조선이 서양에 최초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성동리 은행나무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낯선 땅에서 하멜일행이 겪은 고초와 애환이 서려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하멜의 표류기에 등장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동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에 알려진 영광을 가진다. 전국의 많은 은행나무 중에서 수관이 크고 수형이 아름다기로 손꼽히는 나무이기도하다. 강진군은 이런 하맬과의 인연을 활용해 1998년 그의 고향 호르큼시와 자매 결연을 맺어 문화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있으며 2007년에는 하맬기념관을 개관했다.
많은 사가(史家)들은 그 때 그들의 선진문물을 받아 들였다면 조선이 더욱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쇄국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주 포충사에서 만난 안동 학봉 종손의 기념식수 주목(朱木) (0) | 2015.09.23 |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왕벚나무를 발견한 다겟 신부와 천주교대구교구청의 왕벚나무 (0) | 2015.09.15 |
맹부(孟府)에서 이름을 알게 된 정여창 고택의 백석류(白石榴) (0) | 2015.08.25 |
건륭황제와 공묘의 용목(龍木) (0) | 2015.08.09 |
강화초지진의 총탄의 흔적을 품고 자라는 소나무 (0) | 2015.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