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꽃의 자원으로서의 중요성을 맨 처음 제기한 대구시의 공익광고
진달래 .혹은 참꽃이라고 한다. 식용이 가능하며 화전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기도 한다. 술을 담가 먹기도 한다.
철쭉 혹은 연달래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소백산 철쭉제가 유명하다. 독성이 있다.
산철쭉 청송 지방에서는 수달래라고 한다. 독성이 있다.
달성군화(達城郡花) 비슬산 참꽃
전국적으로 꽃을 주제로 하는 축제는 많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시작한 곳은 군항(軍港) 진해이다. 1953년 충무공 이순장군의 동상을 세우는 일과 더불어 시작했다고 하니 60여 년이 넘는다. 36만 그루의 벚꽃이 필 때에는 장관을 이루어 전국각지에서 200만 명 정도가 정도가 찾는다고 한다.
다음이 1999년부터 개최된 전남 구례군의 산수유축제이고, 그 외 광양의 매화축제, 소백산 철쭉제, 주왕산 수달래제, 무안의 백련축제, 영덕의 복사꽃 축제, 순천만 갈대축제 등 지역도 여러 곳으로 늘어나고 꽃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이런 현상은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이든 안하는 사람이든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식물이 단지 초식동물을 길러내고, 약용으로 이용되고, 토양의 유실을 방지하며, 건축자재로 활용되는 이외 사람들의 마을을 즐겁게 하여 일상에 지친 시민들에게 위로를 주고, 자연의 소중함을 기억하게 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비슬산의 참꽃축제도 마찬가지다. 달성을 널리 알리고 지역경제에도 큰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참꽃이 축제의 자원으로서 중요성이 알려지게 된 것은 대구광역시의 노력이 컸다.
대구시가 민선 1기를 맞아 대대적인 나무심기사업을 하면서 구군, 읍면동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으로 한 가정 한그루 심기운동, 담장허물기운동, 나무시장개설 등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추진하는 이외 시민의 공감대를 넓히는 방안의 하나로 1996년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청구, 우방, 화성, 보성 등 기업의 협찬을 얻어 일간지에 광고를 했다.
그 때 광고 표제는 “아름다운 숲의 도시 대구 우리 손으로 만듭시다”였다. 이어 하단에 중점 시책을 나열했다. ‘중앙공원(현, 감영공원), 동인공원(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획기적 개발’, ‘나무시장운영’ ‘덩굴식물무상보급’ ‘녹화지원센터개설’ ‘기념식수동산조성’ ‘나무사랑바자회개최’ ‘상록/유실수보급확대’ ‘비슬산진달래 군락지조성’ ‘대형인공폭포설치’ ‘이팝나무단지’ ‘앞산·팔공산·두류산·고속도로변경관개설’ 등11개 사업이었다.
이로서 ‘비슬산진달래 군락지조성’ 사업은 푸른대구가꾸기사업의 핵심 의제의 하나가 되었다.
처음 이 광활한 천상의 화원, 진달래 군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군의 담당공무원에게 물었더니 면적은 30만평 소유자는 군(郡)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종이 철쭉이라고 해서 아연했다. 간혹 철쭉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우점종(優占種)은 분명히 진달래이다. 그런데 유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산림공무원이라면 아주 초보적인 진달래와 철쭉도 구별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시정의 주요 의제로 채택되게 하기 위해 상관인 국장(局長)에게 현장을 직접 보여주는 좋을 것 같아 당시 배상민 국장을 산불진화용 헬기에 모시고 현장을 답사했다. 그 때 일행이 탄 헬기가 인흥마을 상공을 지나가게 되어 셔터를 누른 결과 남평문씨본리세거지(대구시 민속문화재 제3호)가 일목요연하게 사진에 담겼다. 인화하여 시장께 보였더니 마을 주변의 보기 싫은 비닐하우스는 지우고 쓰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본리세거지 사진은 잘 정비된 마을안길과 여러 채의 고택을 다 표현하는데 미흡했다. 왜냐하면 마을이 평지에 있어 정면에서 촬영하면 가장 자리에 있는 고택의 담장과 지붕만 보일 뿐이었다. 지금과 같이 드론이 없던 시절에는 그럴 수밖에 없어 시나 군에서 발행되는 도서(圖書)의 사진이 모두 그랬다.
참꽃 군락지 보전의 또 하나의 걸림돌은 군락지 내에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소나무와 갈참나무였다.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 참꽃이 도태될 것이 뻔했다. 경북대학교 홍성천 교수와 영남자연생태보존회 류승원 회장을 초청하여 현지에서 의견을 구했다. 홍 교수는 산림경영의 목적이 진달래군락지 보존이라면 지장을 주는 나무들을 베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고, 류 회장은 인위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지양하고 그대로 놔두어 자연에 맡겨 천이(遷移)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나 전자를 선택했다.
그 후 나머지 세부 전략은 군에 맡겼다. 이후 군 공무원들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연간 60만(2017년)정도가 찾는 달성군을 대표하는 축제로 발전했다.
진달래를 통해 지역의 가치를 높인 사례는 강릉시에서도 보았다. 몇 년 전 강릉의 모 시민단체가 대구의 나무심기 추진사례를 발표해 주면 좋겠다고 하여 강릉을 찾았다. 하루 전 여장을 풀고 발표가 다음날 오후 시간이라 시청의 녹지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전에 시가지를 한 번 돌아보자고 제안했다.
강릉은 바다와 접하고 경포호가 있으며 주변에 수피가 붉은 큰 소나무들 이른바 적송(赤松)이 울창하여 시의 슬로건도 “솔향의 강릉”일 만큼 환경이 좋은 곳이다. 그런데 시가지에서 정동진 가는 길 이름이 “헌화로(獻花路)”라고 하여 깜짝 놀랐다.
그리고 실제로 도로변에 헌화가의 이미지를 형상화해 놓았다. 일연 스님이 우리 비슬산에서 구상하여 군위 인각사에서 펴 낸 것(일부 학자들은 비슬산 인흥사에서 완성했다고도 함)으로 알려진 <삼국유사> 권 제2 기이 편 수로부인(水路夫人) 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바닷가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 진달래가 만발하여 있다. 공의 부인수로가 이것을 보더니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꽃을 꺾어 내게 줄 사람 없는 가’ 그러나 종자(從者)들은 ‘거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고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이때 암소를 끌고 곁을 지나가는 늙은이 하나가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가사까지 지어 바쳤다.---노인의 헌화가(獻花歌)는 이랬다.
자줏빛 바위는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을 진데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
이 향가는 국문학 상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글은 그것을 언급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이 작품의 배경이 경주에서 강릉 가는 길이니 지금의 국도 7호선일 것이고, 점심때 일어 난 일이라 이 작품이 탄생한 장소가 포항이나 영덕, 더 나아가 울진쯤이 되어야하는데 이들 시나 군은 외면한 반면에 다소 엉뚱한 강릉시가 활용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하면 강릉시 공무원이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정명(正名) 진달래를 왜 참꽃이라 하느냐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으나 인근 주민이 오래 동안 불러온 이름인 만큼 오히려 친근감이 있다고 생각된다. 청송 주왕산의 수달래도 산철쭉의 방언이다.
비슬산은 관기와 도성 두 선사의 이야기로부터 도끼자루 썩는 신선이야기까지 전설의 보고이기도 하지만 대구시민의 큰 바위얼굴이다. 즉 전국의 수많은 산 중에서 유일하게 산 이름, 비슬(琵瑟)에 임금 왕(王)자가 4개나 들어 있어 왕에 버금가는 나라 발전에 기여할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 중 한 분이라고 한다.
진달래꽃이 붉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중국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 온다.
“중국의 촉나라에 망제라는 왕이 어느 날 문산이라는 산 밑을 지날 때 산 밑을 흐르는 강에 물에 빠져 죽은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망제 앞에서 눈을 뜨고 살아났다. 이상히 생각한 망제가 그에게 물으니 ‘저는 형주 땅에 사는 별령(鱉靈)인데,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물에 빠졌는데 어찌해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망제는 하늘이 자신에게 어진 사람을 보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별령에게 집과 벼슬을 내리고 장가도 들게 해 주었다. 망제는 그 때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약했다.
정승자리에 오른 별령은 은연중 불측한 마음을 품고 대신과 내시들을 자기 심복으로 만든 다음 정권을 휘둘렀다.
때마침 별령에게는 천하절색인 딸이 있었는데, 그는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국사를 장인인 별령에게 맡기고 주색에 젖어 나라를 돌보지 않았다. 이런 사이 별령은 대신과 짜고 망제를 나라 밖으로 추방시키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타국으로 쫓겨난 신세가 된 망제는 고국 촉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울기만 했다.
울다가 지쳐서 죽었는데, 한 맺힌 그의 영혼은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 (不如歸, 돌아갈 수 없음)를 부르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 한 맺힌 피가 진달래 뿌리에 스며들어 꽃이 붉어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달래과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달래, 산철쭉, 철쭉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심지어 학자들조차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진달래는 경상도 방언으로 참꽃이라 하여 식용이 가능하며 술도 담고 화전으로도 활용하며, 산철쭉은 개꽃 또는 수달래로 불리며 꽃과 잎이 거의 동시에 나오며 독성이 있고, 철쭉은 연달래라고도 하며 소백산의 철쭉제의 주제 꽃으로 역시 독성이 있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주인 양관 선생과 국우동 느티나무 (0) | 2018.03.04 |
---|---|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의 나무 이야기 (0) | 2018.01.21 |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산실 비슬산과 만지송 (0) | 2018.01.05 |
청백리 곽안방선생과 현풍곽씨 충효의 상징 배롱나무 (0) | 2017.12.25 |
옛 현풍 관아 터 현풍초등학교의 종가시나무 (0) | 2017.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