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청주인 양관 선생과 국우동 느티나무

이정웅 2018. 3. 4. 08:06

 

청주 양씨 대구 칠곡 입향조 거은 양관이 심은 느티나무

거은 양관의 묘비

봉래 양사언의 "태산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무대 중국 태산의 정상

 

청주인 양관 선생과 국우동 느티나무

청주 양씨(楊氏)의 시조는 암곡(巖谷) 양기(楊起)이다. 본래 원나라 사람으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중서성정승이었다. 그 때 원(元)나라 수도 연경(현, 북경)에는 고려 제27대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 전(顓, 훗날 공민왕)이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22세 되던 해 전은 원나라 황족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 하였다. 1351년 충정왕(忠定王)의 뒤를 이어 고려 제31대 왕위에 올라 고려로 돌아올 때 양기(楊起)는 그의 수행원 일원으로 왔다. 그 후 원나라로 다시 들어가 고려 조정에서 힘겹게 바쳐오든 4대 조공 즉 동녀(童女) 5천인, 준마 3만 필, 비단 3만 동, 저포 6만 필 등을 영구히 면제받고 돌아 왔다.

이에 공민왕은 높이 치하하며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 및 상당백(上黨伯)으로 봉하고 본관지를 청주(淸州)로 하사했다. 그 후 다시 벽상삼한창국공신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394年(조선 태조 3) 92세로 서거하니 시호를 충헌(忠憲)으로 내렸다.

이러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시조를 둔 청주 양문은 조선조에 와서도 청백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지만 가장 회자되는 인물은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다. 안평대군, 김구(金絿), 한호(韓濩)와 더불어 조선 전기 사대명필로 일컬어졌다. 그는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 부사와 함흥부윤 등 8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산수를 즐기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드라”

는 “태산가”가 대표작이다. 청주 양씨가 대구에 정착한 것은 경기도 포천 출신인 8세 남재(南齋) 양득효(楊得孝, 1572~1645)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용양위(龍讓衛) 병절교위였다. 대구진관(大丘鎭管)에 배속된 그는 부사과(副司果) 겸 훈련원 판관(判官)인 무관이었다.

이즈음 낙재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이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군무에 종사하면서도 유학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그 문하에 들어갔다. 남다른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노력은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통쾌하게 강설(講說)하는 데는 양군(楊君)에 미치지 못 한다”라고 할 정도로 칭찬을 받았다.“ 이런 그의 공부하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는 낙재는 흔쾌히 사위로 삼으니 처의 고향 다사 이천에 살게 되면서 대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대구 칠곡 즉 퇴천방 자지미(紫地未)(현, 북구 국우동) 입향조는 남재의 손자 10세 거은(莒隱) 양관(楊綰, 1618~1680)이다. 부인은 거창인 부장(部將) 신눌(申訥)의 딸이다. 아호도 칠곡의 옛 이름 팔거(八莒)에 은거하면서 살겠다는 뜻으로 거은(莒隱)으로 하고 자식들의 교육과 선현들의 글을 읽는 것을 즐기며 새로운 땅을 일구며 살았다. 400여 년이 된 지금 관계, 금융계, 의료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있으나 선비집안답게 교육자가 많으니 일청(一靑) 양재하(楊在河, 1879~1945)와 그의 아들 지산(芝山) 양인석(楊麟錫, 1909~2003)박사, 은초(隱樵) 양재춘(楊在春,1876~1953), 그의 아들 양백석(楊百錫, 1914~1978)이 그들이다.

일청은 1908년 수창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28년간 교단을 지키며 1천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퇴직 후에도 야학당을 개설해 문맹퇴치운동을 벌리는 등 주민들의 교화에 힘썼다. 저서로 <일청문집>이 있고 1960년 교육공덕비가 칠곡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아들 지산은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면서 초대 도서관장,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 대구불교신도회장, 한국자연보존협회 이사장 등 교육행정과 제자양성, 자연보호에 일생을 바쳤다.

특히, 전국최초로 팔공산에 자연휴식년제를 도입하여 생태계보호에 새로운 모델을 개발했고, 희귀종 세뿔투구꽃을 발견해 세상에 알렸다. 국민훈장모란장, 동백장을 받았다.

연구서로 <식물학개론> <생물학개론> <한국식물검색편람> 등이 있으며 교양서로 <백화송> <우리 꽃 좋을시고> 등을 남겨 교육자로서 종교인으로서, 식물학자로서 다양한 분야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은초 양재춘(楊在春)은 양씨서당을 열고 죽림학숙재단(竹林學塾財團)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길렀으며 그의 아들 양백석 (楊百錫)은 일제 강점기 마을회관에서 3년 여간 성인 야학을 개설하였고, 1946년 국우공민학교인가를 받아 교사로 재임하며 도남초등학교 신설을 위해 노력 했고, 교단생활 24년 중 도남초교 등 고향인 칠곡지역 내에서만 만20년 간 봉사했다.

그들의 본향 자지미 마을 거은재(莒隱齋) 앞에는 입향조 양관이 심은 느티나무가 온갖 풍상을 겪었으나 양문의 깊은 뿌리처럼 굳건하게 자라고 있다. 여름에는 그늘을 제공하고 추석에는 그네뛰기를 하여 주민들의 만남 장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