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최씨 중랑장공파 종대에 월당 최담이 심은 은행나무
종대 표석(연촌공 완동의 구제)
전주 한옥마을 은행나무길
2005년 부터 자라기 시작한 맹아
월당 최담이 지은 한벽당(전북 유형문화재 제15호)
전주인 월당 최담과 종대(宗垈)의 은행나무
호남의 고도 전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한국도로공사수목원, 경기전, 한옥마을, 전동성당 등을 둘러보고 맛있는 비빔밥에 모주를 곁들어 식사를 하고 시내만 관광하고 온 적도 있지만 어떤 때는 구이저수지 쪽으로 모악산을 넘어 금산사를 보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진산 모악산(794m)은 대구의 팔공산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혹시라도 그 숨은 비밀을 찾아 볼 수 있을까하는 욕심이 있어서다. 팔공산의 원래 이름은 부악(父岳)이다. 모악이나 부악은 전국 어느 곳에도 없는 산 이름이다 두산의 머리글자를 합하면 부모(父母) 즉 어머니와 아버지가 된다.
전국의 많은 지명이 아무런 뜻 없이 지어지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주의 주재자가 일부러 작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 팔공산의 동화사(桐華寺)는 모악산 금산사(金山寺)의 법맥을 계승한 절이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사체(四體)가 찢어지는 고된 수행 끝에 미륵을 친견하여 얻은 불간자가 속리산 법주사를 거쳐 마지막 모셔진 절이 동화사다. <삼국유사> “심지계조(心地繼祖)”는 ‘심지가 진표조사를 계승하다’ 라는 뜻이다.
당시 신라에는 많은 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 허다한 절을 뇌두고 왜 동화사로 전래되었을까 이 역시 부처님의 원대한 구상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이 이외에도 전주를 도읍지로한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 왕건과의 싸움에서 몇 번에 걸쳐 패배를 하지만 대승을 거둔 곳이 팔공산이다. 전주를 찾을 때 마다 이런 숙제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칠곡향교의 5월 답사지가 전주였다. 달포 전 갔다 왔기에 참가하지 앓으려다가 지난 가을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향교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이 너무 인상 깊어 동행했다.
우선 한옥마을 골목투어에 나섰다. 가이드가 큰 은행나무 앞에 서서 수령이 600년이며 이 나무로 인해 거리 이름이 “은행나무길”로 명명했으며 이곳은 “전주최씨 중랑장공파 종대(宗垈)” 라고 했다.
노거수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나에게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전주를 몇 번 왔었지만 도심에 이런 보물(?)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었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월당(月塘) 최담(崔澹, 1346~1434)이었다. 본관이 전주로 고려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낸 시조 최아(崔阿)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사온서 직장(直長)을 지낸 을인(乙仁)과 어머니 전주박씨 사이에 1346년(충목왕 2) 태어났다.
9살에 아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 자랐다. 매우 영특하고 학문을 좋아해서 1362년(공민왕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임금을 모시는 내시(內侍)의 참관(參官 6품의 관원)에 제수되었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했으나 홀로 계신 노모를 모시기 위해 낙향하였다. 1383년(우왕 9) 완산부 풍남동에 아들 4형제를 가르치기 위해 독서실로 강당을 지으며 이 때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올해를 기준으로 635년 전이다.
이 후 자제들을 훈육하고 시문을 지으며 명사들과 교유하기를 20여 년, 한 재상의 천거로 봉상시奉常寺,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의 소경(少卿)이 되고 1398년(태조 7) 중훈대부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진하여 임무를 마치고 1400년(정종 2)낙향하였다.
1404년(태종 4) 전주 팔경의 한 곳에 한벽당(寒碧堂, 전북 유형문화재 제15호))을 지어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즐기던 중 1416년(태종 16) 71세 되던 해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집현전 제학에 제수되었다. 1434년(세종 16) 돌아가시니 향년 89세였다.
네 아들 중 첫째 광지(匡之)와 둘째, 직지(直之)는 1399년(창왕 1) 문과에 동방급제하고 벼슬이 각기 집현전 제학(提學)에 넷째 덕지(德之) 1405년(태종 5) 역시 문과에 급제, 예문관 제학(提學)에 이르렀으며 셋째 득지(得之)는 장흥교수, 고산현감을 역임해 전주최씨 중랑장공파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종대에는 최근 월당과 교유했던 명사들의 면면을 알 수 있는 시문을 빗돌에 새겨놓았다. 그 중에서 광주출신의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 1390~1453)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 광주의 명사로 그가 수식(手植)한 괘고정수(掛鼓亭樹, 광주시 기념물 제24호, 실제 수종은 왕버들) 한그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왕버들은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謨叛事件)으로 5대손 이발(李潑)과 그의 일족이 죽임을 당하면서 말라죽었다가 이후 억울함이 밝혀지자 다시 새 잎이 돋아 가문의 중흥을 예고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현재에도 자람이 왕성한 나무다.
광주광역시에서는 그의 아호를 딴 연장 4.2km의 필문로(畢門路)가 있다. 이 필문이 월당을 위해 쓴 시는 다음과 같다.
전주는 예부터 현인이 많다하는데 / 그 중에 선군만이 오복이 완비되었네. / 벼슬을 내 놓고 부모에게 효도를 성심껏 하니 / 은혜를 베풀고 가족이 화목하여 예로써 갖추었네. / 네 아들 같이 벼슬할 때 세 아들은 출중하고 / 팔십을 넘어 구십 세가 되었네. / 이미 정한 기이한 서기는 기록에 드러나 있고 / 전래되는 가업은 몇 천 년 내려가리. (비문에서 전재)
이외에도 찬시(讚詩)를 쓴 분으로 성균관 사성 정곤(鄭坤),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김종서, 개성유수 신석조(辛碩祖), 대제학 권맹손, 매죽헌 청지 안평대군, 영중추 안지, 집현전 제학 김요(金銚), 인수부 소윤 안숭신 등이 있다.
시기적으로는 조선 전기 신분으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으로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위층 인사들과 폭 넓게 교유하여 월담의 인품이 어떠했느냐를 입증하고 있다.
종대의 월당이 심은 은행나무는 이런 점에서 전주최문(全州崔門)의 상징이자 고을의 자랑이다. 후손들은 물론 지역공동체가 보듬고 보살펴야할 대상이다. 길 이름 만으로의 대접은 격이 너무 낮다. 연륜에 비해 수세도 강건하다. 전라북도기념물이나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높여야 할 것이다.
또 보호수안내판의 설명도 좀 더 다듬을 필요가 있다. “2005년 새끼나무가 나타나 길조(吉兆)로 여겨 나무 아래서 호흡을 5번하면 나무의 정기(정력)를 받게 된다하여 많은 시민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는 글 중에서 새끼나무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시(市)가 의뢰해 국립산림과학원의 검증한 결과 모수(母樹)와 유전자(DNA)가 동일하다면 새끼가 아니라 맹아(萌芽) 즉 새로 돋은 싹이다. 따라서 ‘새끼나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정기(정력)라는 표현 역시 이런 세속적인 말보다는 나무를 보며 마음을 다잡아 공부를 했을 4형제 중 3명이 그 어렵다는 그래서 한 고을에 한명이 날까 말까한 문과 급제자를 3명을 배출한데서 찾아야할 것이다.
즉 종대의 은행나무에는 급제의 정기가 흐르고 있다. 어려운 공무원시험이나 입학 또는 입사시험의 “합격수(合格樹)”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종대의 은행나무는 뿌리가 깊고 넓게 퍼져 대구, 경북에도 뻗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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