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 장현광 선생 좌상(일부)
여헌 선생이 심은 회화나무
임란으로 집이 소실되자 제자 장경우와 친척들이 1606년 (선조 39)에 지은 모원당(경북 문화재자료 제390호)
여헌 종가 남산고택
종가 내 여헌 사당
여헌 장현광선생과 남산고택의 회화나무
조선왕조 500여 년 중 백성들이 가장 고달픈 삶을 살았던 때를 말하라고 한다면 7년의 왜란이 있었던 선조대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황, 이이, 조식, 류성룡, 정철, 이순신, 이항복, 권율, 허준 등 훌륭한 인물이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니 어떤 이는 이때를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한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도 그 중의 한 분이다.
공은 아버지 열(烈)과 어머니 경산이씨 사이에서 경상북도 인동현(현, 구미시, 인의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자호는 여헌이다. 9세에 자형 노수함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1571년(선조 4) 약관 18세에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요약한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몇 번에 걸쳐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42세 때 류성룡의 천거로 보은현감에 제수되어 선정을 펼치다가 건장이 나빠져 오래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공의 높은 학문과 인격을 높이 산 서애(西厓)는 아들을 보내 배우게 했다.
1603년(선조 36) 의성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몇 달 만에 돌아왔다. 그 후 순천, 합천군수,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에도 성균관사업, 사헌부집의, 이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 용양위부호군, 형조참판, 사헌부대사헌·등에 출사할 것을 명하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지중추부사, 의정부우참찬 등 보다 높은 관직을 주며 불렀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러나 정묘호란 시 호소사로 명을 받고는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포기했다. 그 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포항의 입암(立岩)으로 들어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공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했다.
저서로 <여헌집>·<성리설(性理說)>, <역학도설(易學圖說)>, <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으며 1637(인조 15년) 84 세로 돌아가셨다. 인조가 제문에서 “500년 만에 한 번씩 나타나는 인물”이라며 애석해 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공에 대한 졸기는 다음과 같다. “전 의정부 우참찬 장현광이 졸하였다. 자(字)는 덕회(德晦)이고 본관은 인동이다. 젊어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조 때에 대신이 천거하여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고을 수령을 제수하자 비로소 명에 따랐으나 곧 버리고 돌아갔다. 반정한 처음에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가 유도(儒道)를 숭상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스리겠는가.’ 하고는 사헌부 장령으로 징소(徵召)하였다. 한 해 안에 징소 하는 명(命)이 잇달으므로 드디어 조정에 나아가니, 상이 매우 후하게 예우하고 앞으로 크게 쓸 뜻이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돌아가겠다고 청하였다. 그 뒤에 또 교자(轎子)를 타고 올라오게 하였는데,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대사헌이 되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정축년의 난 때에 영천(永川, 현,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입암산(立巖山) 속으로 들어가서 졸하니, 향년 84세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장현광은 바르고 어질고 겸손하고 검소하여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는데, 이제 문득 졸하니 내 매우 슬프다.’ 하고, 이어서 장사를 치를 물건을 넉넉히 주어 장사지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지은 <역학도설(易學圖說)>과 <성리설(性理說)> 등 서적이 세상에 유행하며, 그 문하에서 유학한 자가 매우 많았다. 여헌 선생(旅軒先生)이라 칭한다. ”
1657년(효종 8)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성주의 천곡서원, 선산의 여헌영당, 인동의 동락서원, 청송의 송학서원, 영천의 임고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포항의 입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명문 인동장씨 남산파 종가 남산고택에는 살던 집이 임란의 피화로 소실되자 장경우를 비롯한 제자들과 친척들이 1606년(선주 39)에 지어준 모원당(慕遠堂, 경북 문화재 자료 제 390호)이 있다.
그 앞에 선생이 손수 심은 회화나무가 잘 조성된 넓은 뜰 한복판에 서 있다. 회화나무는 학자나 선비를 상징하는 나무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올곧은 선비로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고 후손들이 또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라는 것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가지가 일부 마르고 있어 연로한 종부께서 큰 걱정을 하신다. 시청에 몇 번 전화했으나 수액 주사를 놓아 주는 이외 특별한 조치가 없었다고 한다.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석축이 원인인 것 같다. 헐어내고 뿌리가 멀리 넓게 뻗도록 하는 것이 생장에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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