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봉 서원 강당 앞의 감나무 감나무는 오덕을 갖춘 예절지수라는 별칭이 있다.
월봉서원 강당 빙월당 (광주시 기념물 제9호)
월봉 기대승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숭덕사
고봉선생문집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
월봉서원 연혁과 고봉 기대승선생의 행장 등을 기록한 묘정비
고봉 기대승선생과 월봉서원의 감나무
영남과 호남은 혈연과 학연으로 날줄과 씨줄처럼 얽힌 지역이다. 호남출신의 신숙주, 김인후, 서재필 등은 본관지가 영남이고, 영남출신의 문익점, 사육신의 한 분으로 유일하게 대구에서 혈손을 보전한 박팽년 등은 본관지가 호남으로 모두 나라의 인재들이고, 김인후, 기대승 등은 각기 영남 출신의 김안국, 이황의 제자들이라는 점이 그렇다.
이외에 본관지가 호남인 광산김씨, 전주최씨, 반남박씨 등은 영남지역에서 명문으로 자리 잡은 집안이고 본관지가 달성배씨, 성주이씨, 밀양박씨 등은 본관지가 영남이면서도 호남에서 명문으로 자리 잡은 가문이라는 뜻이다.
광주시 광산구 광곡길 133 너브실마을에 있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기리는 월봉서원을 찾아가면서 평소 품고 있었던 생각이 떠 올랐다. 이 서원은 고봉 사후 7년만인 1578(선조 11)년 호남유생들의 공의로 지은 신룡동의 망천사(望川祠)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정유재란의 화로 피해를 입고 월봉산 아래로 옮겨 지으면서 1654년(효종 5) 월봉(月峰)으로 사액되었으나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훼철의 비운을 맞았다. 이어 1941년 현재의 위치에 빙월당을 짓고 1978년 증축을 거쳐 1981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봉은 본관이 행주로 아버지 진(進)과, 어머니 진주인 강영수(姜永壽)의 딸 사이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삼촌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그는 소과는 물론 대과를 장원으로 급제한 엘리트코스를 밟고 조선조 학문의 최고 기관인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정통관료이자 올곧은 유학자이다. 특히, 이황과의 편지를 통한 8년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은 조선유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퇴계는 58세의 대학자이자 관직이 대사성인데 비해 그는 이제 갓 벼슬길에 나선 32살의 신출내기였다. 이러한 지위나 나이 차이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기주장을 펼치고 나중에는 서로가 인간적으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이황의 사단,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이(理)에서,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 욕(欲) 등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한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제자로는 정운룡, 고경명, 최경회, 최시망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집>, <논사록>·<주자문록> 등이 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고봉이 얼마나 퇴계를 존경했는지는 한편의 시 “꿈에 퇴계선생을 뵙다”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난밤에 어렴풋이 스승을 모시었고 / 오늘 밤에도 정답게 웃고 말씀하셨네.
분명한 생각으로 아직도 세상걱정하시니/ 선생께서 매화에만 집착 않으심을 알 수가 있네. 라고 하는 시이다.
퇴계 역시 그의 학덕과 인품을 높게 평가하여 선조가 인물을 천거하라고 하자 “고봉은 학식이 넓고 연구가 깊어 그와 견줄 자가 드뭅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가히 통유(通儒, 세상일에 두루 통달한 유학자)라고 할 만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월봉서원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공직에 있다고 은퇴한 후 지금은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로 근무하고 있는 김 선생께서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강당 빙월당 (광주시 기념물 제9호) 당호는 “눈 내리는 달밤에 얼음같이 맑은 마음 즉 빙심설월(氷心雪月)이라는 말로 정조가 하사했다고 한다. 앞은 동재(명성재)와 서재(존성재) 강당 뒤에 제향 기능인 사당 숭덕사(崇德祠)를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인 서원배치형태를 취해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강당 옆에 큰 감나무가 이외였다. 빙월당을 건립할 때 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의 국학이 유학(儒學)이고 그를 대표하는 향교나 서원에 주로 심는 나무가 은행나무나 회화나무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색다른 수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력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감나무에 대한 조선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나라 학자 단성식(段成式 803~863)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감나무는 잎이 넓어 글씨를 쓸 수 있어 문(文)이고, 목재가 단단해서 화살촉을 깎으니 무(武)이며, 겉과 속이 붉으니 표리부동하지 않는 충(忠)이고, 치아가 없는 노인도 즐겨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니 효(孝), 서리를 이기고 오래도록 매달려 있는 나무이니 절(節)이 있는 오덕(五德)을 갖춘 예절지수(禮絶之樹)라고 했다. 이런 뜻을 담고 심은 것일까? 서원을 나서며 450여 년 전 퇴계와 고봉이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이런 아름다운 만남이 영호남 사람들 사이에 이어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림가 문의순과 아홉산숲 관미헌의 칠곡 은행나무 (0) | 2018.07.30 |
---|---|
문정공 하서 김인후선생과 필암서원 향나무 (0) | 2018.07.22 |
한국 최초의 사과나무 2세목 고사(枯死) (0) | 2018.06.16 |
여헌 장현광선생과 남산고택의 회화나무 (0) | 2018.06.03 |
전주인 월당 최담과 종대(宗垈)의 은행나무 (0) | 2018.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