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 동재 후원의 향나무 공자가 심은 회(檜)나무를 고증하여 심은 것 같기도 하다.
필암서원 확연루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필암서원 강당 청절당 당호는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강당 뒤편의 은행나무 유학을 공부하는 공간 즉 행단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중국 곡부 공자 사당 대성문 안에 있는 공자가 심은 회나무 죽기살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지금의 나무는 1732년 청 황제 옹정 10년에 싹이 돋은 것이라고 한다.
겸재 정선의 그림 부자묘노회(夫子廟老檜) 즉 공부자묘의 오래 된 회나무를 그린 그림이다. 현장을 갈수 없는 처지이기에 상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전나무와 비슷하나 잎이 떨어져 어떤 나무를 모델로 그렸는지 불분명하다.
문정공 하서 김인후선생과 필암서원 향나무
LH를 은퇴하고 지금은 모 감리회사의 임원으로 광주에 근무하고 있는 이동영씨의 초대로 장성 필암서원을 찾았다.
장성군 황룡면 필암서원로(184)에 있는 이 서원(사적 제 242호)은 대원군이 전국의 많은 서원을 훼철시킬 때에도 보존된 47개 서원 중 하나로 호남에서는 광주의 포충사, 정읍의 무성서원과 더불어 존치된 3개 서원중 하나이자. 향교 내 문묘(文廟)에 모셔진 우리니라 18현 중 호남출신으로는 유일한 문정공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를 주향(종향, 양자징)하는 서원이다.
하서는 본관이 울산으로 아버지 참봉 김령(金齡)과 어머니 옥천 조씨(玉川趙氏)사이에서 장성에서 태어났다.
김안국(金安國)에게 글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퇴계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1540년(중종 35)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고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 했다.
1543년(중종 38)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훗날 인종)를 가르쳤다. 또한 기묘사화 때 희생된 여러 선비들의 잘못 알려진 점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부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 가까운 옥과(현, 곡성군 옥과면)현감으로 나가기를 자원했다.
1544년(중종 39)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성균관전적 등 여러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서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기대승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기대승에 동조하였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 변성온, 기효간, 조희문, 오건(吳健) 등이 있다. 저서로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으며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필암서원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제향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하서가 장성에서 태어난 것은 시조 김덕지로부터 17세손이자 밀양부사를 지낸 온(穩)의 부인 여흥민씨가 태종의 비 원경왕후를 비롯한 무구, 무질 형제 등 민씨 일가가 화를 입을 때 이를 피해 낙남하여 장성에 자리 잡은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초대 대법원장으로 법관의 사표로 추앙 받는 김병로, 동아일보 사장과 제2대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는 그의 후예이다.
이번 답사에서 또 알게 된 사실은 서울 출신이나 대구에서 활동하고 훗날 18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와 도동서원에 배향된 환원당 김굉필이 호남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즉 무오사화로 순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최산두·유계린·윤신·최충성·유매권-김인후·유성춘·유희춘으로 이어지는 호남유학의 한 계파를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하서의 많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덕계 오건(吳健)이다. 류성룡,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대표적인 제자이자 남인 예학의 대가인 한강 정구를 학문의 길로 들게 한 분이 덕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를 보면 하서는 제자 덕계를 통해 영남에도 유학의 씨앗을 뿌렸다.
강당으로 들어가는 길 좌우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공자(孔子)가 은행나무(실제는 살구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杏壇)의 고사에 따라 이곳이 유학의 성역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필암서원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나무는 동재 후원의 향나무였다. 공묘(孔廟)의 회(檜)나무를 상정하고 심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회(檜)나무를 우리나라 자전(字典)에서는 노송나무, 전나무로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향교나 서원에 실재하지 않는 노송나무대신에 전나무를 심어 공자의 학통을 이어가려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가 심은 회나무는 중국에서는 원백(圓柏) 또는 회백(檜柏)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향나무로 불린다. 두 나무가 같다고 하는 이유는 각기 영어로 차이니즈 쥬니퍼(Chinese Juniper)라고 하기 때문이다. 다만 모양이 우리나라 향나무는 대개 뿌리부분에서 여러 가지가 나오고 수관이 달걀형인데 비해 중국의 회나무는 외줄기로 곧게 자라 우산 모양 같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는 두 나무가 오래 동안 지역의 환경에 맞춰 진화해 온 현상으로 보인다. 필암서원의 향나무는 누군가 이런 회(檜)나무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알고 심은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나무 한그루 심는 데도 고증을 기하려고 노력한 것 같아 역시 필암서원이 평범한 서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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