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 역사학자, 관료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온몸으로 국권회복에 앞장섰던 한서 남궁억 상
한서 남궁억 기념관 주변에 조성된 무궁화 동산
한서 남궁억의 묘소 황성신문 사장 , 성주목사 등 다양한 직함이 있으나 칠곡부사를 묘비명으로 썼다.
한서 남궁억 기념관
한서 남궁억의 나라사랑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서교회 현재호 담임목사
칠곡부사 남궁억선생과 나라꽃 무궁화
일제강점기 나라사랑을 일깨우기 위해 무궁화 30만 그루를 전국에 보급하고 서재필 박사와 더불어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학교와 교회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 황성신문을 창건하여 언론으로 일제에 맞서다가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유명을 달리한 독립운동가 이자 언론인, 교육자, 종교인으로 온몸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던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 1863~1937)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용감(?)하게 표제(標題)를 “칠곡부사 남궁억”으로 붙였다.
공은 본관이 함열(咸悅, 전북 익산)로 아호는 한서(翰西)이다. 한성부 왜송동(현, 정동)에서. 아버지 중추도사(中樞都事) 남궁영(南宮泳)과 어머니 덕수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종황제의 통역이 되었다. 31세에 칠곡도호부사가 되어 2년여를 재직했다. 이어 내부 토목국장으로 서울시가지 중심부를 정비하고 탑골공원을 조성했다. 1896년에는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2년 러·일협정의 침략적 성격을 논박하는 사설을 실어 다시 구속되어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3년 박영효 등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는 모함을 받아 다시 구속되었다가 석방 후 황성신문 사장을 사임하였다. 1905년 고종의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 뒤 귀경하였다. 1906년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자 사임하였다. 11월 장지연 등과 대한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기관지 “대한협회월보”를 발행하였다. 1908년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하며,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를 발행하였다. 1912년에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장를 조성하여 전국에 보급하고 “무궁화예찬”시도 지어 많은 사람이 부르게 했다. 또한, 나라사랑하는 뜻이 담긴 찬송가를 만들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하였다. 1933년 11월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으나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 딸 숙경은 일찍 혼자되어 한서를 마지막까지 보살폈고 둘째 딸 자경은 윤치호의 차남과 결혼했으며 외아들 염(炎)은 미국으로 이주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도우고 해방 후 초대 뉴욕주재 총영사로 활동했으며, 그의 1녀 2남 중 맏아들 준은 미국 내 소수민족인권신장에 노력했고, 둘째 아들 진은 세계적인 임학자로 박정희 정부 시절 현신규 박사의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산림육종분야를 자문해 할아버지로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가 나라사랑과 국위를 선양에 이바지했다.
2019년은 칠곡도호부가 가산산성 안에 설치되었다가 팔거현 옛 치소(현, 대구시 북구 읍내동 일원)로 옮겨 온지 200년이 되는 해가 된다. 지역의 문화단체인 “팔거역사문화연구회”에서는 이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금년에는 부사 157명에 대한 행록집(行錄集)을 발간하고, 내년에는 도호부사의 도임(到任)모습을 재현해 지역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고 있다.
회원일행은 강원도 홍천의 한서남궁억기념관을 찾았다. 그가 마지막 칠곡도호부사였기 때문이었다. 관장을 겸하고 있는 한서교회 현재호 담임목사의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으며 그가 나누어 준 <한서 남궁억의 생애>를 통해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칠곡지역 40여명의 동학도(東學徒)들의 활동과 지역의 유력자로 훗날 2차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하였던 관천(觀川) 배석하(裵錫夏, 1857~1926, 현 칠곡향교 배종찬 전교의 증조부)와 교류한 이야기, 주민이 글자판을 구리로 만든 송덕비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일행은 묘비를 보고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황성신문 사장, 대한협회 회장, 성주목사 등 칠곡부사(漆谷府使)보다 더 명예로운 직함이 있음에도 굳이 묘비명을 “칠곡부사 남궁억의 묘”로 썼기 때문이다.
기념관 주변에 넓게 무궁화동산이 조성되어 있으나 당시 묘포장은 일제강점기 강제 폐원(廢園)으로 그가 직접 심은 나무는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아 아쉬웠다. 현재 기념관을 돌보며 한서의 분신처럼 나라사랑정신을 되살리고 있는 현(玄) 목사의 본관이 성주(星州)라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성주현씨의 관향이 원래 팔거(八莒, 칠곡의 옛 이름)이기 때문이다. 한서는 칠곡부사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의 사상을 구현하고자 하고 있는 현 목사 역시 본디 칠곡사람(?)이라 두 사람의 칠곡과의 인연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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