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김덕령장군이 심었다고 전해 오는 왕버들(천연기념물 제 539호) 원래 5그루 였으나 현재 3그루만 남아 있다.
충장사 정문 충용문
충효동정려비각(광주시 기념물 제4호)
충효동정려비각 안에 보전되어 있는 빗돌(전면)
왕버들 안내판
충장공 김덕령장군과 충효동 왕버들
공자 등 많은 현인들이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를 오래전부터 설파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있다. 더구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아 졌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졌지만 여전히 사회가 혼탁한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특히,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하여 목숨마저 잃게 하여 더 일할 기회마저 빼앗은 것은 개인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나라로서도 큰 손실이다.
무등산 자락에 태어나 임란 때 담양에서 의병 5,000명을 모아 출정했고 1595년(선조 28)에는 경남 고성으로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하였으며, 이순신 장군과 수륙연합작전을 펼쳐 진해, 고성을 방어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터무니없는 무고로 희생된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1568~1596)장군 사당을 둘러보고 그가 태어난 마을과 태어날 때 심었다는 500년 된 줄기가 굵어 위엄마저 느껴지는 큰 왕버들을 보면서 더욱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공의 억울함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묻히지 아니하고 조정에 알려져 좌찬성에 가증(加贈)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형, 아우까지 벼슬을 추증을 받고 마을이름 충효리도 하사받았다. 이러한 내력을 담은 충효동정려비각(광주시 기념물 제4호)안의 빗돌 뒷면에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이 쓴 비문의 대강은 이렇다.
“옛날에 충용장군 김덕령공이 초야에서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흉악한 왜적을 막아냈다. 위엄과 명성이 일본에까지 알려져 진동하였으나 뜻 밖에 화를 당해 죽었다. 그의 형 덕흥도 금산전투에서 먼저 죽었고, 부인 이씨도 왜적을 만나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
충과 열이 한집안에 모였는데도 억울한 원한이 풀리지 못하고 아름다운 빛이 나타나지 못하니 군자들이 슬피 여겼다. 현종 임금께서 비로소 공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병조참의를 추증하였으며, 숙종 임금께서는 병조판서를 가증하고 의열(義烈)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셨다.
지금의 임금(정조)은 또 좌찬성(종1품)을 가증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으며 이씨에게는 경경부인을 추증하고 덕흥에게도 지평을 추증하였다. 이어 공의 마을을 충효리라 이름을 주고 비석을 세워 표시하기 위하여 신 (서유린)더러 뒷면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세상에 공을 원통하게 여기는 이들은 항상 공을 악무목(송나라 충신, 악비)과 비교하지만 무목은 언성대첩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공은 의병을 일으킨 초기부터 이미 권력자들의 방해를 받아 뜻을 품은 채 무기를 준비하였으나 백에 하나 써보지도 못하였다. ---충신이 훌륭한 대우를 받는 것이 어찌 생사에 대한 차이가 있겠는가. 공의 아우 덕보에게도 지행(志行)으로 집의(執義, 사헌부의 종3품)를 추증하여 세 형제를 의열사에 함께 모시게 했다.“
우리는 이 비문을 통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공의 억울한 죽임에 대한 조야 지식인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으며 그로인해 임금들이 벼슬을 추증하였으나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좌찬성(종1품)으로 높였고, 충장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형은 지평(持平, 사헌부의 정5품), 아우는 집의에 추증되어 삼형제가 모두 적절한(?)한 예우를 받았으며 마을 이름 충효리도 하사 받았다. 다는 사실과 비문을 쓴 서유린은 공을 송의 명장 악비(岳飛)보다 더 충의가 높은 장수로 평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공을 눈여겨보고 조정에 천거하고 무고의 억울함을 규명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경상도 예천 출신의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 )이다. 그는 이순신이 하옥되었을 때 목숨을 걸고 구명하여 백의종군하도록 하여 명랑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한 사람이자 선조가 의주로 몽진(蒙塵)가며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만들어 전란을 수습할 때 보좌한 인물이다.
그가 공을 구하려고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김덕령옥사계(金德齡獄事啓)”에 의하면 ‘다만 적들의 입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로 정황을 따져보지도 않고 서둘러 엄한 국문을 하여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인다면 죄명이 명백하지 않아서 백성들의 의심이 끝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 형 집행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즉 공이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였으나 무고로 옥사되었으니 사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상소는 수용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충효리 왕버들(천연기념물 제539호)은 원래 5그루였으나 현재 3그루만 남았다. 왕성한 푸름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충장공을 비롯해 형 덕흥, 아우 덕보 3형제의 충효를 기리는 것 같아 더욱 돋보인다. 광주시의 중심가 충장로는 공의 시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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