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제자를 가르쳤던 행단을 싱정하여 심은 살구나무
명재고택의 전경 노론의 감시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아예 대문과 담장을 없애버렸다.
명재 고택의 사랑채
고택 우물가의 향나무 전통적으로 우물가에는 향나무를 많이 심었다.
차를 즐겨 먹기위해 뒤안에 심어 놓은 차나무 제주나 보성 같은 난대지역이 아닌데도 잘 자라고 있었다.
대문과 담장이 없는 소론의 영수 명재고택의 살구나무
명재고택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가급적이면 여름에 가고 싶었다. 같은 당파이지만 노론과 달리 남인에 우호적이었던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의 학문과 삶의 흔적이 녹아 있는 고택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점과 인터넷에 떠도는 고택 앞 방지(方池)의 배롱나무 꽃이 활짝 핀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구와 논산은 공간적으로 멀고, 일상에서 자유롭지 못해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가을이 중반으로 치달을 무렵 일행 40여명과 함께 찾았다. 그날따라 안개가 걷히지 않아 도착한 11시 무렵까지 주위를 감싸고 있어 고택이 다소 몽환적(夢幻的)으로 다가왔다.
일행을 맞은 해설사가 대뜸 하는 말이 “경상도에서는 개 이름을 송시열로 짓고 수시로 발로 차며 노론(老論)으로부터 당한 화풀이를 했다는 이야기를 영남지역 출신 동료 해설사로부터 들었다.”고 하여 모두 깜짝 놀랐다.
이런 터무니없는 가짜 뉴스가 지역감정해소에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이야기가 유통되지 않는 다고 하면서 다만 모 집안은 향교를 출입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선대(先代)가 노론으로부터 화를 입어 문묘에 모셔진 서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있다고 했다.
이후 그는 고택의 뒤 안까지 돌아보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어 일행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적인 해설에 감사했다.
명재 윤증은 1629년(인조 7)부터 1714년(숙종 40)사이에 살다간 조선시대의 학자로 호는 명재(明齋)이며 본관은 파평인(坡平人)이다. 명재 윤증은 유계(兪棨), 김집, 송시열,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 수학하였으나 아버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처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공부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그리고 산촌에 묻혀 학문과 덕을 쌓는 것에 전념해 당시 덕망이 높았고 모든 선비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백의정승”이라 불렀다. 1682년(숙종 8)에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大司憲), 1695년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자 1709년(숙종 35)에 임금이 “내 평생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경의 생각은 잠시도 잊지 않았거늘 경은 어찌 내 마음을 알지 못 하는가 ”하며 우의정에 임명하고 사관을 보내 임명장을 전했지만 14번의 상소를 올리고 끝내 사양했다.
1714년(숙종 40) 병이 위독해지자 자손 및 제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내가 죽은 후에 선비의 예절로써 장사지내고 명정(銘旌,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성명을 적은 조기 )에는 내 관직을 쓰지 말고 작은 선비라고 쓰라”고 엄히 당부했다. <출처, 명재고택, 논산시>
이번 답사는 조선시대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사색당파의 한당인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尹拯)의 300년 선비의 집을 살펴보고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지만 또 하나 같은 기호학파이면서도 어쩌면 사소한 문제로 노·소론으로 갈렸고 우세한 노론이 상대 당 소론에 가한 부당한 감시가 있었던 현장을 보는 기회도 되었다.
그 증좌가 바로 담장이 없는 명재고택이다. 노론은 명재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해 공자사당 궐리사를 고택 옆으로 옮겨 짓고, 바로 옆에 있는 향교를 통해 출입자를 살폈다고 한다. 이에 후손들이 대문과 담장을 아예 없애버렸다. 따라서 명재 고택은 여느 사대부집과 달리 솟을대문과 담장이 없다. 같은 학파 소론의 영수에게도 이런 대우를 한 노론의 횡포는 당파가 다른 남인에게는 더 가혹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이후 정조가 탕평책으로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이후 남인은 더 이상 영의정을 배출하지 못했다. 일당 독재의 피해는 그 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200여 년간 지속되었다.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금은 역사의 한 부스럼 같은 것일 뿐이지만 해설사가 개 이름을 특정인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짓고 화풀이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을 정도로 남인들의 한은 컸다. 명재고택은 충청도 양반가옥의 전형이라고 한다. 특히, 몇 몇 조경수가 특이했다. 뒤 안의 옻나무, 차나무가 그렇고 샘가의 향나무도 일품이며 서쪽 언덕의 큰 느티나무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랑채 앞의 노쇠한 살구나무 한그루가 이색적이었다. 종손에 의하면 원래 3그루였다고 한다. 과실을 따 먹기 위해서 심은 것이라기보다는 행단(杏亶)을 상징적으로 조성한 것 같다. 많은 선비들이 중국 곡부의 공묘(孔廟) 앞, 공자가 제자를 가르쳤던 행단을 두고 행목(杏木) 즉 은행나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살구(杏)나무다.
후학들이 스승 윤증을 공자처럼 훌륭한 유학자라는 것을 비유해 일부러 심은 것 같다. 고목이라 줄기 아래 부분이 썩고 있으나 베어내지 말고 잘 건사했으면 한다. 용계, 노강, 용암서원 등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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