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머니와 함께 심은 구미 생가의 감나무

이정웅 2018. 10. 28. 17:02

 

박정희 대통령 존영 생가 홍보판에서 전사

1929년 박정희 대통령이 12살 때 어미니 백남의 여사와 함께 심은 감나무

 

올해는 감이 더 많이 열린 것 같다. 찾을 때 마다 관리인에게 잘 가꾸라고 하였다고 한다.

 생가 태어나서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린시절 공부하였던 앉은뱅이 책상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머니와 함께 심은 구미 생가의 감나무

고향 친구와 더불어 구미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찾았다. 몇 번 가본 곳이지만 갈 때마다 감회가 남다르다. 특히, 아내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그 빈자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드 역할을 했던 딸 근혜 마저 헌정사상 초유로 탄핵되어 영어의 몸이 되어 있어 더 그랬다.

생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에 비하면 다소 초라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뜻 있는 사람들과 경북도와 구미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이 건설 중에 있으나 그것마저 재원 조달이 불투명하고 이름에 박정희를 뺀다 하고 심지어 구미시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새마을과도 논의 끝에 겨우 유지하기로 하였다니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일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계신다면 오히려 반가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고 우람한 기념관을 지어 놓되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과장되거나 부풀려지면 오히려 지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도 아니고 더 이하도 아닌 지금 이대로 보전하는 것이 가난을 물리치고 조국의 근대화를 이룩한 박대통령의 사상을 더 잘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6~70년대 중반 공직에 몸담았던 우리라고 하여 박정희 정권을 무조건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3선 개헌, 유신 등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었다. 더구나 박봉이라 가족들을 부양하기 힘겨웠고 공휴일은 물론 일요일도 쉬지 못했다. 또한 수당도 없었으나 일은 오히려 오늘날의 공무원보다 더 많고 힘들었다. 그 때는 식량증산이 정부정책 제일의 목표였다. 벼와 보리를 한 톨이라도 더 생산하기 위하여 반강제로 통일벼 재배를 장려했고, 보리 파종면적을 넓히려고 애썼다. 지금은 쌀이 남아도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 때에는 대다수 국민들은 삼시세끼 밥 먹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박정희 대통령은 보릿고개를 없앤 것만 아니다. 중화학공업, 철강, 고속도로 등 많은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쌓아 우리나라가 세계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한 앞날을 내다보는 지도자였다. 생가의 안내 팸플릿의 생애와 업적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성빈(朴成彬)공과 백남의(白南義)여사의 막내아들로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다. 구미공립보통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공립보통학고 교사를 지낸 후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군(軍) 주요 지휘관을 역임하고 1961년 5·16혁명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다.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1963년에서 1979년까지 제5대부터 제9대 대통령을 역임하는 동안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가난을 물리치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았다. 새마을운동으로 국민정신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민족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1976년 10월 26일 서거,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라고 했다.

공적에 비해 내용이 너무 소략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하든 앉은뱅이책상, 농기구 등 많은 유물이 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따뜻한 손길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은 뒤 안 우물가의 감나무 한그루이다.

안내판에 “이 감나무는 (고동시) 박정희 대통령께서 1929년 경 봄에 어머니와 같이 심어 큰 나무로 자라서 감도 많이 열리고 하였으나 6, 25전화로 나무의 일부가 타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 박대통령께서 생가에 오시면 생가 관리인에게 이 감나무가 잘 자라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시곤 하였음” 이라고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12살 때 심은 나무다.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 어머니는 곶감을 만들어 제수용으로, 어린 박정희는 감 홍시가 먹고 싶어 크게 자라 감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바라며 심었을 것이다. 언젠가 한 지인에게 청와대로 옮기면 어떻겠는가 묻기도 하였다고 한다. 어른이 된 그가 잘 관리하라고 당부한 것은 감을 따서 먹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따뜻한 모정(母情)이 남아 있는 생물이기에 그 무엇보다 소중해서 그랬을 것이다.

올해는 감이 더 많이 달린 것 같다. 이맘 때 쯤 열리는 서울 국립현충원과 생가에서의 추모제 중에 구미 생가에서는 구미시장이 초헌관을 늘 맡았으나 39회째인 올해는 불참해 이철우 도지사가 대신 했다고 한다. 박정희 흔적지우기 일환이라고 하나(매일신문, 2018년 10월 22일자) 내가 간 그날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