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사람의 종장 사계 김장생선생 초상 문인으로 아들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이 있다.
돈암서원의 향나무
돈암서원 (사적 제383호)
강당 응도당(보물 제1569호)
돈암서원 전경(출처, 문화재청)
기호사림의 종장 사계 김장생선생과 돈암서원 향나무
남인 예학의 대가 한강 정구(1543~1620)를 기념하는 한강공원과 그가 강학했던 사양정사(泗陽精舍) 준공 고유제 때 “한강 정구선생 대구 사수에서 6년”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고 불과 사흘 뒤에 서인 예학의 대가 사계 김장생(1548~1631)을 주향하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의 거두들을 배향하는 논산의 돈암서원(사적 제383호)을 찾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대구시 북구 사수동 사양정사는 한강 예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오선생예설>, <예기상례분류>, <오복연혁도>가 완성된 곳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사계는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유학자이다. 문묘에 모셔져 있는 우리나라 18현 중 유일하게 아들 신독재 김집(1574~1656)과 함께 부자가 배향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논산시민들 역시 예학의 고장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사계의 높은 학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예학에 있어 남인과 서인의 이론이 어떤 것은 같고 어떤 것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1,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 도신징(1604~1678)의 주장이 숙종의 지지를 받아 우암(尤庵)이 실각하는 계기로 마무리되었다. 1631년(인조 9) 8월 9일 <조선왕조실록> 사계의 졸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전 형조 참판 김장생이 죽었다. 장생은 자가 희원(希元)으로 자질이 돈후하고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일찍이 율곡 이이를 따라 성리학을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쏟아 독실하게 좋아하였다. 독서할 적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경전과 염·락(濂洛, 주돈이와 정이)의 여러책들을 가지고 담겨 있는 뜻을 탐색하였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낮으로 사색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귀취를 얻고 난 다음에야 그쳤다.
또 고금의 예설을 취하여 뜻을 찾아내고 참작하여 분명하게 해석하였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하였다. 일찍이 신의경이 편집한 상제서(喪制書)를 정리하고 절충하여 《상례비요(喪禮備要)》라고 이름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하였다. 장생은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며 화기가 애애하였으나, 일의 시비를 논하고 사람의 선악을 분변할 때는 엄정한 말과 낯빛으로 굽히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선조(宣祖) 초에 유학을 존숭하여 장려하였는데, 상신 박순(朴淳)이 성인의 경전에 침잠하고 옛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는다고 그를 천거하자 드디어 벼슬하여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다. 상이 반정(反正)하여 덕이 높은 이를 구하였는데, 장령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왔다. ----장생은 조정에 있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은데다가 나이도 많았으므로 드디어 청하여 연산(連山)으로 돌아갔는데, 형조 참판으로 불렀으나 장생은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집에서 병으로 죽으니 나이 84세였으며, 학자들이 ‘사계(沙溪)선생’이라고 일컬었다.
부고(訃告)를 아뢰자 제사와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이조 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장례 때에는 본도(本道)에게 조묘군(造墓軍)을 지급하도록 하였는데, 원근에서 장례에 모인 자가 거의 1천 명이나 되었다. 뒤에 장유(張維)가 경연에서 시호를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예를 의논한 것이 합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657년(효종 8) 문원(文元)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1717(숙종 43) 문묘에 배향되었다. 문인은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 장유 등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다. 저서로 <상례비요>, <가례집람>, <전례문답>, <의례문해> 등 예학에 관한 것과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있다.
돈암서원을 비롯해 해주의 소현, 파주의 자운, 안성의 도기서원 등 1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어느 날 우복 정경세(1563-1633)가 그를 찾아가 사윗감을 부탁했다. 그때 사계의 제자 3명이 다른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사계가 이르기를 그중에서 누구를 골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하니 우복이 문 앞에 서서 인기척을 했다. 이때 한 젊은이가 마당까지 내려와 방으로 정중히 모셨고, 또 다른 한 젊은이는 한 번 쳐다보고는 보던 책을 마저 읽었으며, 세 번째 젊은이는 팔베개를 하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들이 각기 이유태, 송준길, 송시열로 모두 훗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동량이었다. 그때 우복은 송준길을 택했다. 너무 예의 바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만하지도 않으며 단정한 태도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사당 숭례사 내 배롱나무와 큰 소나무가 이색적이었으나 은행나무와 회화나무가 가득한 다른 서원과 달리 이렇다 할 조경수가 없어 넓은 경내가 다소 썰렁해 보였다. 그러나 공자가 수식한 회(檜)나무의 의미를 살려 향나무를 심은 서원이 그리 많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여느 서원과 격이 다름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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