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한국황씨 도시조 한학사 황낙과 울진 월송리 소나무

이정웅 2018. 11. 17. 17:32

 

우리나라 황씨 도시조 한학사 황낙의 존영(출처; 한국황씨 중앙종친회)

한학사 유허지에 문중에서 조성한 숲

겸재 정선의 월송정 그림 가운데 울창한 솔숲이 잘 표현되어 있다.

도시조 황낙을 기리는 재사 숭덕사

황낙이 교지국(현, 베트남)으로 가다가 표착했다는 월송정 앞 바다

 

황씨 도시조 한학사 황낙과 울진 월송리 소나무

관동팔경의 한 곳인 월송정은 황씨문중이 조성한 솔숲으로 더욱 아름다운 곳이 된 명승지이다. 우리나라 모든 황씨의 도시조 황낙(黃洛)은 본디 중국 사람이다. 28년(신라 유리왕 5) 사신으로 교지국(交趾國, 현, 베트남)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착한 곳이 월송정 부근의 해안이다.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의 세 아들이 있었고 이들이 기성군(箕城君), 장수군(長水君), 창원백(昌原伯)으로 봉해지면서 각각 평해, 장수, 창원황씨의 시관조가 되었다.

세종을 보좌한 황희 정승, 퇴계의 애제자 황준량을 비롯해 고려`조선시대 평해 지역에만 첨의평리 황서(黃瑞), 조선개국공신 양무공 황희석(黃希碩), 성균대사성 황현(黃鉉), 동래부사 황여일(黃汝一) 등을 배출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평해군 누정 조를 보면 월송정(越松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을 동쪽 7 리에 있다. 푸른 소나무가 만 그루요 흰 모래는 눈 같다. 소나무 사이에는 개미도 다니지 않으며, 새들도 집을 짓지 않는다. 민간에서 전하여오는 말이 ‘신라 때 신선 술랑(述郞) 등이 여기서 놀고 쉬었다.’ 하였다”

 

고려 말 삼은(三隱)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 1298~1351)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가을바람에 옛 자취 찾아 말머리 동쪽으로 돌리니 / 울창한 정자 소나무 좋기도 하구나. / 몇 해 동안이나 마음은 신선 지경 찾으려했나 / 천리 먼 길에 길 떠나려 양식을 방아에 찧었네. / 도끼의 액운이 없었으니 한위(漢魏)를 지났고 / 제목은 큰 집을 지을 수 있으니 기룡(夔·龍,, 순 임금의 어진 신하)에도 비기겠네. / 난간을 의지하여 자연 침음(沈吟, 속으로 깊이 생각함)하기 오래인데 / 졸렬한 붓으로 만분의 일도 형용하기 어렵다.” 고 격찬했다.

 

또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평사(平沙) 십리에 흰 그물 깐 듯하고 / 장송(長松,미끈하고 높게 잘 자란 큰 소나무)이 하늘에 닿아 옥창 끝처럼 가늘구나. / 쳐다보니 밝은 달은 황금 떡과 같고 / 하늘 물과 같이 끝없이 드넓네. / 객이 와서 1년마다 퉁소를 부니 / 풍류는 모두 신선의 무리이네, / 내가 따라가 요지(瑤池, 신선이 사는 못)에서 잔치하려하니 / 날아오는 푸른 새가 벽도(碧桃, 복숭아나무의 일종)를 물었네. " 라고 했다.

 

이외에도 안축 등 여러 명사들의 시가 있으나 솔숲을 비교적 잘 표현한 작품을 골라 본 것 뿐이다. 이런 문학작품과 여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현재 월송정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명승지였고 여말(麗末)과 심지어 겸재 정선의 그림 “월송정”이 그려진 조선후기까지 솔숲이 울창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한때 파괴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자료 <조선의 임수(林藪, 1938)>에 의하면 “시조 황낙의 묘지 주변이 황폐해지자 100년 전 후손들이 소나무 4만 8,400그루를 이식하고, 단소(壇所)와 재사(齋舍)를 세우고 묘지기를 두어 보호·관리에 힘썼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 “임황(林況)”에서도 “소나무 단순림으로 최대 흉고직경 35cm인 것은 드물게 있고, 25cm 정도도 있지만 대부분은 10cm 내외이다. 수고는 4~10m로 평균 6m 전후, 본수는 어림잡아 3만 8,000그루에 달한다. 매우 울창하고 숲 안은 대체로 솔새와 털깃털이끼류 등이 땅을 덮고 있으며 낙엽이 쌓여 있는데 간혹 나지(裸地)도 있다.”고 했다.

따라서 180여 년 전 대대적인 그것도 황씨 후손들에 의해 약 5만 그루의 소나무가 심어졌고, 80여 년 전 임황조사 시에는 그 중에서 4만 여 그루가 평균 가슴 높이 지름 10cm 정도로 자라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숲은 황씨의 도시조 황낙의 발자취가 서린 단소와 재실 일대를 성역화하기 위해 후손들이 조성한 분묘림(墳墓林)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월송정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풍치림 역할도 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모래를 막아 농경지를 보호하는 방풍림으로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월송정 숲은 민간이 조성하여 성공한 특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지역에 국가가 관리하는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 보다 그 가치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교육적인 면에서도 좋은 현장이 된다.

그러나 숲에 이름도 없고(황씨시조제단원림?), 면적이 얼마인지, 몇 그루가 자라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가꿀 것인지 알 수 없다. 민간에 맡기기보다 지방자치단체나 국가가 나서서 천연기념물이나 명승으로 지정하여 보전할 필요가 있다. 황씨가 벌족, 명문인 것은 울창한 이 솔숲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