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심은 것으로 보이는 매화나무
초성 황기로가 건립하여 사위 이우에게 물려 준 매학정
매학정의 원경
1983년대의 매학정 일대
청송인 영의정 심회가 양머니를 위해 시묘했던 바위 시묘암
보천탄 주변 최근에 조성한 수변 공원, 매화숲으로 조성하여 매학정의 유래를 살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현장이다.조경가들의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을 보여주는 현장, 주변경관과 더불어 전국 최대의 매화원을 만들 수 있어 관광자원화 할 수 있었다.
옥산 이우선생과 구미 매학정 매화나무
율곡 이이(李珥)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기호학파의 종장이자 대과를 비롯한 여러 시험에 9번을 장원한 전무후무한 기록의 소유자이자.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여 임란에 대비하자했던 분이며,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사임당 신씨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인 옥산 이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분이 많다. 대체로 형에 비해 학문이 떨어지고, 그림 역시 어머니 그늘에 가려지고, 벼슬도 형에 비해 높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특히, 형이 후학들이 득세한 기호지방에서 활동했던 것과 달리 그는 당파가 다른 남인의 땅에서 활동한데 따른 것도 다른 이유일 수 있다. 그가 출생지 강릉을 떠나 선산에 자리 잡은 것은 초서의 성인 즉 초성(草聖)으로 불리는 고산 황기로의 사위가 되어 그의 전지(田地)를 물려받은데 따른다.
옥산이 이어받은 재산에는 드라마틱한 일화가 숨겨져 있다. 역사는 조선 태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들 세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한 태종은 처남인 민무구, 무질 형제들을 비롯해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마저도 처형한다. 이 때 심온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고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한 유모는 그 아이를 업고 정처 없이 내려오다가 선산 땅에 이르러 고단한 몸을 어느 삼밭에 뉘였다. 밭주인 주부(主簿) 강거민(康居敏)이 그날 밤 삼밭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하인을 보내 살펴보니 한 여인이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자고 있는지라 아이를 받아 길렀다. 훗날 양부 강주부가 죽자 3년 동안 상복을 입었고, 양모(養母) 전씨가 죽자 3년 동안 시묘하니 그가 영의정에 오른 소헌왕후의 동생 심회(沈澮, 1418~1493)였다. 시묘바위는 지금도 남아 있다. 강 주부는 자식이 없으므로 재산을 양아들 심회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심회의 증손 심흥원(沈興源)이 사위를 보니 그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였다.
그 역시 심흥원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고 뒷산을 고산이라하고 중국 서호의 고산(孤山)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처학자(梅妻鶴子,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을 삼는다는 뜻)’로 불렸던 북송의 은둔 시인 임포(林逋)의 삶을 닮고자 했다. 1533년(중종 28)년 매학정을 지었다.
그 후 고산이 사위를 보니 율곡 이이의 아우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이다. 그 역시 아들은 없고 딸만 있어 고산의 재산은 옥산이 물려받았다. 이로써 매학정 일대의 토지는 그 소유가 처음 신천강씨에서 -청송심씨-덕산황씨-덕수이씨로 이어지는 매우 독특한 내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우가 고산의 사위가 된 것은 형 율곡이 성주부사 노경린(盧景麟, 1516~1568)의 딸과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성주 6개월간 머물 때 당대 이름 난 선비 고산과 우의를 가진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옥산의 이곳에서의 생활은 순탄했던 것 같다. 관직으로 비안현감, 괴산군수, 고부군수, 군자감정에 이르렀으며 시·서예·그림, 거문고(詩·書·畵·琴)에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4절로 불릴 만큼 예술가로서도 성공했다. 옥산의 여러 시 중에서 매학정은 다음과 같다.
낙동강 나룻가에 날리는 빗발 (洛東飛雨度長沙) / 어깨 위에 비 뿌려 옷 적시더니 ((亂僕吟肩濕短哀) / 늦은 녘에 눈 되어 바람에 불려 (向晩凄風吹作雪) 고산에 많은 나무 매화뿐일세 (孤山千樹換梅花) (출처, 선산인동부 고시문집, 2002, 구미시)
이 시문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고산의 많은 나무 매화뿐일세”라는 구절이다. 매처학자라라는 고사(故事)의 주인공 임포는 그의 거쳐 주변에 300그루 매화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옥산의 시를 보면 매학정 일대에는 이보다 더 많은 매화나무가 있었던 것 같다. 현재 그 많았던 매화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루터기도 남아있지 않고 최근에 심은 그 것도 관리가 여의치 않아 생육상태가 불량한 예닐곱 그루뿐이다. 특히, 4대강을 정비하면서 새로 생긴 매학정 앞 보천탄(寶泉灘) 주변의 수변공원에도 매화가 아닌 다른 나무들을 더 많이 심어 이황, 황준량, 성운, 송시열을 비롯해 명사들의 문화공간이기도 했던 유서 깊은 매학정의 경관을 되살리지 못해 아쉽다.
임란 시 매학정은 불탔다. 1654년(효종 5) 승정원 승지를 지낸 증손 이동명(李東溟, 1624~1692) 옛 터 조금 내려와 새로 짓고 1675년(숙종 1) 귀락당(歸樂堂)도 지었다. 1862년(철종 13) 민란으로 다시 소실되고 1968년 선산유림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재건한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정자 뒤의 회화나무는 1843년(헌종 9) 건립되었다가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매강서원(梅江書院, 이이, 이우 배향)을 지을 때 심은 것 같고 앞의 큰 히말라야시다는 1968년 김봉환 국회의원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일대는 조선을 대표하는 훌륭한 예술가 고산과 옥산의 삶의 흔적이 베인 명소이기도 하지만 당파가 극심했던 시대 노론의 영남 진출 교두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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