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대구와 대등한 칠곡도호부 읍치(邑治) 지역인 대구칠곡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져가는 옛 문화유산이 매몰되는 것이 안타까워 이를 발굴, 홍보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팔거역사문화연구회 배석운 전,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성군(聖君) 세종의 외삼촌이자 태종의 비(妃),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남동생이며, 매형 이방원이 왕으로 등극하는데 크게 기여를 했던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 여성군(驪城君) 민무질(閔無疾, ?~1410)이 대구에 유배 되었으며 그곳이 바로 북구 노곡동에 소재한 금호강 하중도(蘆谷河中島)로 체류 기간 중 결혼까지 하였다는 이야기를 모 씨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유배지라면 제주도나 남, 서해안, 섬쯤으로 생각해 온 터였기에 대구가 유배지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제보한 사람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하였으나 더이상은 모른다며 만나기를 꺼려하여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언(傳言)은 향후 대구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금호강하중도의 중요한 역사자원으로 조선 초기 권력 투쟁의 비화가 숨어 있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화제여서 향토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노곡교와 팔달교 사이에 있는 금호강 하중도는 “갱빈(강변)” 또는 “섬들”로 불렀다. 포항시 죽장면 가사령에서 발원하여 영천, 경산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금호강의 여러 하중도 중에 유일한 사유지(私有地)이며 한때는 채소 생산의 주산지로 면적은 22만3천㎡(67,458평), 길이 1.1㎞, 폭 260m로 국가하천 금호강 대구권 하중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250만 명이라는 소비자를 곁에 두고 있는 주민들은 한 포기라도 더 생산하기 위하여 여느 지역과 달리 연간 5~6 모작하였으며 덧붙여 비료와 퇴비를 많이 사용했다. 따라서 금호강은 물론 낙동강을 크게 오염시켰다. 2010년 대구보건환경연구원이 실시한 오염원별 부하량 조사 결과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전체 부하량의 절반은 금호강이며, 금호강에 유입되는 BOD 부하량의 25%가 하중도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대구시에서는 4대강 살리기 사업과 연계하여 260억 원 (보상가 202억 공사비 58억)을 투입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526동의 비닐하우스를 철거했으며, 대구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2017년 “금호강 하중도 명소화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우선 1단계로 2019년까지 9,400 백만 원을 투입하여 진입 보도교(L=220m B=4m), 지하철 3호선과 연계하는 보도교(L=130m B=3m) 진·출입로 개설, 전망대, 조명등 설치, 좌안 둔치주차장 정비 및 확장, 노곡교 및 주변 경관개선 및 상징조형물, 꽃단지 조성 및 화장실, 파고라 등 편의시설 설치하고 이후 2단계로 하중도 내 자전거길 조성, 레일바이크, 태양광발전설치, 문화관광프로그램 도입 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중도의 높이가 25.44m로 200년 빈도의 금호강 홍수위(28.44m)보다 3.0m 낮아 활용에 제한이 많다. 그러나 유채나 코스모스 등 철마다 피는 꽃단지는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아 현재 북구 8경 중 한 곳으로 뽑혔다.
민무질이 어린 세자 충녕대군(훗날 세종)를 세워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죄인의 몸으로 대구로 유배 온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1408년 (태종 8) 11월 19일 자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사간원에서 대구 현령 옥고(玉沽)의 죄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소(疏)에 이르기를, 국가에서 대간(臺諫)을 설치하여 서관(庶官)을 규찰하기 때문에, 대간이 이문(移文)하면 서관이 급히 봉행해야 기강을 세우고 사공(事功)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난적 민무질(閔無疾)이 부처(付處)한 곳에 있으면서 그 악한 것을 고치지 않고 잡인(雜人)들과 서로 교결(交結)하고, 또 그 지방 사람인 조득시(曹得時)의 딸에게 장가들어 불법한 일을 자행하므로, 본원(本院)에서 감사에게 이문(移文)하여 그 죄상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차사원(差使員)인 대구 현령 옥고(玉沽)가 난적(亂賊)에게 당부(黨附)하여 곧 봉행하지 않고 있다가, 두세 번 이문하여 독촉하여 사세(事勢)가 부득이한 뒤에야 조금 그 정상을 보고하였습니다. 다른 왕래 교결한 자는 이미 벌써 용서를 받았으나, 옥고 같은 국법을 따르지 않고 소사(所司)를 업신여긴 죄는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유사(攸司)에 내려 그 죄를 엄히 징치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임금이 정언 박안신(朴安臣)을 불러 전교하였다.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을 부처(付處)시킨 곳의 수령(守令)으로서 왕래하며 서로 만나본 자와 민씨(閔氏)에 관한 일은 이미 모두 끝났으니 다시 논하지 말라.” 는 기사다.
즉 민무질은 1407년(태종 7) 11월 21일부터 다음 해 10월 16일까지 약 11개월 유배지 대구에 있으면서 몸가짐을 바르게 아니하고 잡배들과 어울리며, 조득시의 딸과 결혼하는 등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을 경상감사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차사원(差使員) 즉 현지 조사관인 대구 현령 옥고(玉沽)가 오히려 그와 어울렸을 뿐 아니라, 2~3번 독촉한 후에 보고하였으니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였으나 태종이 불문에 부쳤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記事)로 민무질의 대구 유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구의 어느 곳인가는 제시하지 않았는데 그 곳이 바로 노곡하중도라는 설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는 조선 시대 인문지리서인 『세종실록지리지』나 『경상도지리지』, 『신중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등의 어느 사료에도 없다, 따라서 제보한 사람의 이야기만으로는 하중도로 비정(比定)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구전(口傳)되어왔다면 참고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노곡 하중도는 강물의 유속 강약에 의해 토사가 쌓인 일반적인 하중도와 달리 원래는 산 또는 임야였다는 증거가 현재 법적 지목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보충적인 자료를 더하면 예로부터 주위가 강물로 싸인 고립된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민무질 유배는 설득력이 크다. 학자 등 전문가의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그런 조사에도 불구하고 근거를 찾지 못한다면 하중도 명소화 계획에 “민무질과 청백리 옥고 이야기”를 반영하고 아울러 하중도라는 행정용어 대신에 주민들이 늘 불렀던 이름 “섬들” 또는 “금호강 섬들”로 바꿀 필요가 있다.
민무질에 호의적이었던 대구 현령 옥고(玉沽, 1382~1436)는 본관이 의령으로 호는 응계(凝溪). 야은 길재의 문인이다. 18살 소년등과(少年登科)한 공직자의 표상인 청백리였을 뿐 아니라, 『대구읍지』에 등재된 된 몇 안되는 훌륭한 관리 즉 명환(名宦)이다. 일례로 배설(裵泄)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전 “배설은 기지가 있고 총명하였으나 사람됨이 교활하여 법을 멋대로 남용하니 수령들이 대부분 그에 의지하여 정치를 하였다. 배설이 만년에 말하기를 ‘전후 수령들은 내가 모두 거느리고 살았는데 오직 금유(琴柔)와 옥고(玉沽)는 내가 모시고 살아야 했다’라고 말했다.” 고했다.
옥고는 그 후 내직으로 들어가 요직인 사간원 정언, 이조 정랑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으며 55세로 졸했다. 저서로 『응계집』 등이 있고 안동의 묵계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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