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사육신의 혼이 깃든 대구 육신사

이정웅 2006. 9. 20. 21:03

단종 복위 운동을 전개하다가 죽임을 당한 여섯분 중에서 유일하게 혈손(血孫)을 보전한 박팽년(1417~1456)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는 박팽년 선생과 함께 사육신 모두를 모시는 육신사가 있습니다.

 

 

삼족을 멸하는 대역죄로 다스려진 선생이 혈손이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가  대구 감영의 관비(官婢)로 내려와 아이를 낳을 때, 때 마침 여종이 같은 시기에 아이를 낳아 박순의 아내가 남자 아이를 낳으면 죽임을 당하여 박씨가문의 대가 끊어질 것을 염려한 여종이 다른 사람 몰래 자신이 낳은 딸과 바꾸어 길러 화를

면할 수 었었다고 한다.

 

 

 

 

위 육신사 : 입구, 가운데 : 박팽년 등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곳, 아래 : 박정희(왼쪽) 최규화(오른 쪽) 대통령 방문 기념 표석

 

종이라는 뜻으로 비(婢)로 이름이 지어진 그는 외할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자라 17세 때 그의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렀다가 성장한 그를 보고 자수를 권했다. 성종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이름을 일산(一珊)으로 바꾸고 아버지의 고향 충청도 회덕에서 이곳으로 정착하니 이른바 순천 박씨의 대구 묘골 입향조가 되었다.

후손들이 절의묘(節義廟)라는 사당을 짓고, 박팽년의 제사를 지냈다. 그의 현손 계창(繼昌)이 어느 날 고조부의 제삿날 꿈에 여섯분의 선생들이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다섯분의 제물을 차리고 다시 제사를 지냈으며 그 후 오늘 날까지 계속 여섯분을  모시고 있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의 충신, 효자, 위인들의 유적을 정비할 때에 이곳도 오늘날과 같이 말끔히 정비되었다.

또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박팽년 선생의 11세손 이조참판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지은 아름다운 정자(중요민소자료 104호)  하엽정이 있다 

 

일시루

 

 태고정 보물554호(박일산이 지은 집)

 

하엽정(중요민속자료104)

 

박팽년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초기의 문신.
[개요]

박팽년 유허, 대전 동구 가양동
세종 때 집현전학사를 지냈으며,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관직생활과 세조의 즉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 호는 취금헌(醉琴軒).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중림(仲林)이고,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으면서, 그를 비롯하여 황보인·김종서·성삼문 등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당부했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부제학을 거쳐 1454년 좌승지·형조참판을 지냈다. 145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신권의 지나친 강대화와 왕권약화를 우려한왕실세력 중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정분(鄭) 등을 축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세조에게 올리는 문서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대신 '거'(巨)라는 글자를 쓰고 녹봉에도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다시 형조참판에 기용되었다.


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집현전 출신의 관료가 요직에 많이 등용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 대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등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는 조치에 대해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즉각 반발했다. 세조의 전제권 강화와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일부 유신들은 마침내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하려 했다. 당시 형조참판으로있던 박팽년은 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 등 대부분 전직·현직 집현전 유신들과 함께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456년 6월에 창덕궁에서 상왕인 단종 앞에서 명(明)의 사신을 접대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의 호위를 맡은 성승(成勝)·유응부 등이 세조와 그추종자들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갑자기 세조가 이들의 시위(侍衛)를 취소시켰으므로 거사를 후일로 연기했다. 이에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 등이 불안을 느끼고 이를 밀고해 성삼문 등 주모자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가 사람을 보내어 회유하려 했으나, 세조를 '나으리'라고 부르면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옥사했다. 얼마 후 아버지 중림, 동생 대년(大年), 아들 헌(憲)·순(珣)·분(奮) 등 3대가 처형되었으며, 어머니·처·제수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으로 노비가 되었다. 1691년(숙종17)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 秋江集〉에 사육신전을 적어 그를 비롯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6명의 충절을 기렸다.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과천 민절서원(愍節書院),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글씨가〈취금헌천자문 醉琴軒千字文〉에 남아 있으며 묘는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묘역에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