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삼성 창업자 고 이병철님의 생가

이정웅 2006. 11. 20. 22:10

삼성의 창업자 고 호암 이병철님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나 대구로 진출 처음에는 서민들이 즐겨먹는 국수공장을 하면서 기업을 확장 마침내 당대에 세계적인 초일류기업 삼성의 신화를 이루어 낸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최근 생가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지관은 물론 창업자 이회장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비록 시골이지만 정결하게 꾸며져 있고 여느 서민들의 집과 달리 넓은 대지에 기와집으로 지어져 범상한 사람이 아닌 분이 태어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누구나 노력하면 재벌로의 성공이 결코 꿈이 아니라 현실화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언제 태어나서 언제까지 이곳에서 자랐는지를 알려 주는 궁금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부의 많은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기업보국의 정신으로 살아 온 창업자의 혼이 깃든 이 곳은 왜 방치하다시피해 두었는지 안내인을 상주시킬 수 없다면 자세한 안내판이나 유인물이라도 만들어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도록 해 놓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의 이미지를 높였으면 한다.

 대문채

 사랑채

 안채

[창조와 혁신의 대경인 .9]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혁신 또 혁신" 초일류 경영 초석 닦아
일찌감치 무역 중요성 간파 20대에 창업, 60년대말 전자산업 진출 새 지평 활짝
"기업은 곧 사람" 인재 육성에 심혈

이병철이 대구에 세운 삼성상회의 옛 모습. 기념터 조형물을 재촬영했다.
이병철이 대구에 세운 삼성상회의 옛 모습. 기념터 조형물을 재촬영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자신의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첫 대목에서 스승 얘기를 꺼냈다. 자신은 스스로 살아오면서 세상 어디서도 만나기 어려운 훌륭한 스승을, 그것도 두 분이나 모실 수 있었던 행운아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두 사람으로 선친인 이병철 선대회장과 장인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을 꼽았다. 선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스승 이상이었는지 모른다. 삼성 특유의 인재 중시 철학에서부터 초일류를 향한 집념의 절대적 분량을 선친으로부터 배웠다고 에세이집 곳곳에서 써내려가고 있다. 1987년 11월19일 투병 중이던 이병철은 향년 77세, 희수의 나이로 타계한다. 10여년 전의 위암 수술에도 초인적으로 버텨 건강을 회복했던 그였지만 끝내 운명을 달리했다. 세계 유수 언론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전했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 삼성의 창업주이자 한국 경제성장의 설계자가 타계했다.' 사실 그랬다. 그는 삼성이란 초일류 브랜드를 만들어내기 이전에 인생 전부를 대한민국 압축성장의 궤도에 실은 설계자였다.

#일찍 세상을 보다

오늘의 삼성을 여기서 새삼 거론할 필요가 있겠는가만 그래도 몇 가지만 상기해 보자. 대한민국 기업 국가대표로 꼽히는 삼성전자는 2005년 100억불 순이익 클럽에 가입했다. 미국 CNN을 틀면 세련된 삼성 광고가 신물토록 나오고, 뉴욕 브로드웨이의 삼성 광고판은 이제 얘깃거리도 안 된다.

세계를 향한 삼성의 그런 초일류 정신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들이 '선대회장'이라 칭하는 호암 이병철의 인생사를 보면 그 실마리가 보인다.

그는 1910년 천석지기 2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공부를 하던 중 11세 때 벌써 고향을 떠난다. 긴 여정이 시작됐다. 진주·서울에서의 어린 학창시절 후 곧바로 일본으로 유학했다. 중일전쟁의 지각변동 속에 중국대륙을 여행한다. 다시 마산, 대구, 부산, 포항, 만주까지 이립(而立)인 나이 서른도 되기 전에 그는 세상을 보았다. 어쩌면 유목민과 같은 떠돌이였다. 비행기가 초음속으로 나는 지금도 그리 쉽게 쌓을 밑천은 아닐 것이다.

#혁신성

물물교환 형태의 무역에다 양조업과 국수공장을 하던 그가 어떻게 전자산업에까지 신 지평을 열었을까.

68년 한국비료 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이병철은 현업에 복귀하면서 삼성의 일대 전기가 될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한다. 수원 삼성전자 홍보관 동판에 새겨진 그의 69년 발언은 미래를 보는 혜안과 경영철학을 담고 있다. 그대로 전재하는 것이 낫겠다.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건전하고 균형있게 발전하려면 현대적이고 무한한 발전이 기대되는 산업건설이 요망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신 과학기술의 산업화 추세에 발맞추어 선진국에서 현대산업의 총아로서 최근에 고도성장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전자공업'은 풍요한 한국경제의 미래상을 약속해주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자공업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제품과 광범위한 용도, 그리고 연관산업의 파급효과로 해서 무한한 개발과 발전이 예견되는 가장 새로운 성장산업이다."

'다양한 용도, 연관산업의 파급효과, 무한한 개발.' 한 대목도 뺄 데가 없이 2000년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반도체 산업 진출도 같은 맥락이다. 반도체는 이병철 회장의 마지막 사업이자, 이건희 현 삼성 회장의 첫 사업으로 불린다. 초대규모집적회로(VLSI)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집념을 알아차린 선친 이병철은 검토 끝에 사업 진출을 전격 결정, 82년 반도체연구소를 설립토록 한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었다. 그 뒤 삼성반도체의 신화는 익히 들은 대로다.

#사업보국과 인재육성

처음부터 그가 민족의 진운을 생각하며 사업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사업으로 나라를 흥하게 하는 모범을 보였다. 늘 그가 말하던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다. 6·25 전쟁 중에도 국수 장사를 그만두지 않은 그는 사업 자체로 자아실현과 보국을 생각했다.

61년 5·16 군사정변 발발 당시 그는 도쿄에 출장 중이었다. 부정축재자 제1호로 지명되었지만 곧 귀국한다. 그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이끌던 박정희와 담판을 짓는다. 재벌의 재산몰수보다 재벌을 통한 국가경제 건설이 더 중요함을 역설, 박정희를 설득했다.

인재육성 철학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는 일관되게 '기업은 곧 사람이다. 유능한 인재를 얼마나 확보하고 키워,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 54년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 할 사원 공개채용을 도입했다. 이후 그는 30년간 신입사원 2차면접을 직접 했다.

#승부근성과 商才

호암은 단순한 부자의 경지를 넘었다. 거상(巨商)이다. 하늘이 내린 부자인지 모른다. 그런 부자는 하늘의 뜻을 안다. 현실적으로는
수원 삼성전자 본사 홍보관에 있는 호암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흉상.2
수원 삼성전자 본사 홍보관에 있는 호암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흉상.
'승부'다. 그는 숱한 승부를 걸었다. 조미료에서부터 전자제품 1등 승부까지. 또 물건이 된다 싶으면 즉각 인수했다. 무역업에서 금융업으로, 또 첨단전자산업으로. 타고난 상재(商才)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우뚝선 이들은 늘 한 분야만 아니라 스스로의 향기를 발하는 또 다른 구석을 갖게 마련이다. 이병철도 그랬다. 그는 시(詩)를 알았다. 문화재단과 장학회를 설립해 육영과 사회사업에 앞장섰다. 수많은 미술품을 수집. 호암미술관을 건립했다. 국악과 서예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진짜 길에 진정한 자부심을 가진 모양이었다. 대구 삼성상회 기념터에 새겨진 그의 말(출처 '호암자전')이다.

"인생이라는 석재에 신의 모습을 새기는 것도 좋고, 악마의 모습을 새기는 것도 좋다. 다만 나는 그 석재에 사업을 위해 살다 간 한 사나이로 새겼으면 좋겠다."

그는 진정한 '기업가 정신'을 터득했던 모양이다. 그처럼 자수성가한 거상을 이제 한국에서는 어쩌면 더 이상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삼성과 대구

이병철 회장 대구에 각별한 애정, 이 회장 타계후 사업장 사라져 "대구가 정말 삼성 발원지 맞나"

1998년에 나온 '삼성 60년사'의 본문 첫 페이지는 대구의 옛 삼성상회 건물 사진이 차지하고 있다. 대구에서 오늘의 삼성이 태어났음을 알리고 있는 것. 삼성그룹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경북대 출신이 삼성전자 이사 이상 임원 중 서울대를 제치고 가장 많다는 최근 보도도 삼성과 대구의 인연이 무관치 않음을 보여준다.

1938년 3월1일, 대구시 중구 인교동(옛 수동) 61번지 4층 목조건물에 '삼성상회(三星商會)'란 간판이 내걸린다. 삼성은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뜻이었다. 이병철의 나이 만 28세였다. 자본금 3만원의 삼성상회는 광복후 서울로 옮긴 47년까지 근 9년동안 숨가쁜 발전을 거듭하며 자본을 축적한다. 삼성의 모태가 되는 것.

이병철은 대구 근교에서 나온 청과물과 포항에서 온 건어물을 중국과 만주에 수출했다. 절대적인 식량부족 시대였던 탓에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별표국수로 '미미우량(美味優良), 자양풍부(滋養豊富)'라고 선전했는데 엄청 인기가 좋았다. 또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양조도 인수했다. 조선양조는 '월계관'이란 청주와 '은하'란 소주를 내놓았다.

이병철은 대구를 떠났지만, 자기를 키워준 대구에 애착이 컸던 모양이다. 특히 6·25 전쟁은 대구에 대한 그의 애정을 더욱 키웠다. 전쟁통에 삼성물산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고, 이병철은 대구로 피란오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조선양조가 건재해 있었던 것. 조선양조 경영진은 이병철에게 3억원이란 거액의 사업자금을 내놓는다. 부산에서 삼성물산의 맥을 이어가는 계기가 된다.

이후 57년 대구시 북구 침산동 7만평에 대외원조자금 600만달러로 제일모직 공장을 세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사원 기숙사까지 갖췄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이 차례로 공장을 방문할 정도였다. 1964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대구대학(청구대와 합병한 영남대 전신)을 한때 인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병철 사후 언제부터인지 대구는 삼성과 멀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규모 공장이 구미에 들어섰지만 대구에 있던 사업장은 모두 사라졌다. 야구팀 삼성 라이온즈만 남았다 할까.

삼성은 98년 12월 옛 삼성상회 목조건물을 헐고 기념터를 조성했다. 국수공장 내부 평면도에다 삼성의 역사를 새긴 기념벽을 세웠다. 삼성의 모태가 여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간혹 대학생들이 견학차 찾아온다고 주변인들은 전한다. 그래도 왠지 초일류 삼성의 발원지치고는 초라하다는 것이 대구인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약력

△1910년 2월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출생 △진주 지수·서울 수송보통학교, 중동중, 일본 와세다대 정경과 중퇴 △1938년 3월 삼성그룹 모체이자 삼성물산 전신인 삼성상회 설립(대구) △1953년 제일제당 설립(부산) △1954년 제일모직 설립, 1956년 1월 제일모직 대구 침산동 공장 준공 △1958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인수 △1964년 한국비료 설립, 1967년 사카린 밀수사건 후 한국비료 공장 준공 국가 헌납 △1964년 동양 라디오 및 TV 방송국(TBC), 1965년 중앙일보 창설 △1969년 1월13일 삼성전자, 12월 삼성산요(현 삼성전기) 설립 △1970년 삼성 NEC(현 삼성SDI), 1973년 삼성코닝 설립 △19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 설립 △1976년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개장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 설립 △1986년 삼성경제연구소 설립 △1987년 11월19일 타계,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자료제공=호암재단 ◇도움말=채종한(위덕대 교수) ◇공동기획=경북도·대구경북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