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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문신 조위가 살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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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매계(조위 선생의 호)구거'는 송시열 글씨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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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로부터 문경현 경북대 명에교수, 최현득 전 대구시 행정관리국장, 매계후손, 필자
조위[曺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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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454(단종 2)~1503(연산군 9).
조선 초기의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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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가 거처하던 율수재(聿修齋), 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외리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아버지는 현감 계문(繼門)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5년(성종 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1479년 영안도경차관이 되었다. 여러 차례 시제(詩製)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떨쳤고, 유호인(兪好仁)과 함께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검토관·시독관 등으로 경연에 나갔다. 그후 지평·문학·응교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표리(表裏)·녹피(鹿皮) 등을 상으로 받았다. 1491년 검상·장령 등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도승지·호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대사성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사초에 수록하여 올리자 원문대로 받아들여 편찬하게 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부총관을 겸직했다. 149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때마침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의주에서 체포·투옥되었다. 이극균(李克均)의 극간으로 죽음을 면하고 오랫동안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진 뒤 죽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과 더불어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저서로 〈매계집〉이 있다. 황간 송계서원(松溪書院), 금산 경렴서원(景濂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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