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기념중앙공원
등나무
얼마 국정원 직원이 재직 중 불법으로 도청한 테이프를 가지고 나와 이해 당사자인 특정 기업에 거금을 요구하며 협박하다가 당국에 적발되어 본인이 사법처리 됨은 정부기관이 국민의 사생활을 불법 도청한 사실이 공개되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처럼 공무원은 재직 중이거나 퇴직을 해서도 자기가 소속한 집단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외부에 발설하거나 이해 당사자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정해져 있으며 이 원칙은 보안상 비밀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업무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사안이 경미하고 알려서 시민의 이익이 크다면 알려도 무방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으로 저질렀던 일이 몇 가지가 기억난다.
첫 번째는 분배농지소유권 이전등기사무처리였다.
정부수립 후 국회에서는 일인(日人)들이 소유했거나, 내국인(內國人)이지만 3정보 이상 농지를 소유한 지주의 농지를 강제로 매수하여 영세한 농민들에 분배 당시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려는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인 소유의 토지 소의 적산농지는 무상 귀속시켜 소작인이었거나, 관리인이었던 사람들에게 분배하고, 지주의 농지에 대해서는 나라에서 토지 대금을 지불하기로 약정한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급해주었다. 분배를 받은 농민들은 5년 동안 균분해서 그 토지대금을 국가에 납부하면 시군에서는 상환완료증명서를 발급해 주어 농민들이 이 증명서를 법원에 제출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확보하는 제도였다.
당초 법의 취지는 영세한 농민의 생활 향상을 꾀하자는 것이었으나, 시행 중 그만 6 ·25가 일어나 행정업무가 일시 마비됨에 따라 사무처리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일부 공무원이 수납장부(收納帳簿)가 엉터리로 작성하여 1970년대까지도 많은 농지가 본래 목적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변두리였던 신천, 신암, 산격, 복현, 내당, 상중이 등의 땅값이 급등하자 고의적으로 납부하지 않았든 형편이 어려워 못 냈든 미납 상태로 있던 농민들이 너도나도 대금을 납부하고 소유권 이전을 서둘렀다.
이러한 와중에 토지 사기범도 끼어들어 이 업무를 자칫 잘못처리하면 감옥에 갈 위험도 있었으며 실제로 선배 공무원 중에 그렇게 된 사람도 더러 있었다.
따라서 한 계(係)에 있는 동료들은 이 사무 맡기를 서로 꺼려 해 입사 초년생인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서고(書庫)에 들어가 시행 당시의 예규를 살펴보고 수납대장을 신중히 검토해 처리했다.
그러나 농민의 소유가 확실하나 대장의 기록이 애매하여 상사(上司)에게 결재를 받을 경우 이런저런 이유로 승인해 주지 안을 것이 뻔해 시간과 비용이 더 들더라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도록 권유하여 권리를 확보해 주었던 사례이다.
두 번째는 의무조경의 부실에 대한 조치였다.
대구를 쾌적하게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공원과 녹지를 늘리는 ‘푸른 대구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사실상 예산 확보가 어렵다. 또한 민간이 짓는 건물의 경우 건축법에는 심을 나무의 수량과 규격이 엄연히 정해져 있다.
따라서 건축주가 법에 정해진 대로 조경만 한다면 시비(市費)를 절약하고도 녹색도시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건축공무원들이 조경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태만해서 그런지 건축물의 구조(構造)나 안정성에만 관심을 둘뿐 조경 지도에는 소홀해 어떤 경우에는 나무를 심어 놓았다가 준공검사 후에는 뽑아 버려도 누구하나 간섭하려 하지 아니하고 마지못해 법에 정해진 규격이나 수량만큼 나무를 심는다 해도 사후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아 죽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이다.
어느 도시가 쾌적하고 아름답게 되기 위해서는 시는 시대로 투자를 확대해야 하지만 시민들도 법을 준수해야 가능하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시민들의 법 위반 사례를 해당과에 통보해 시정할 수도 있으나 그럴 경우 자기 과의 일이나 챙기지 남의 과의 일 가지고 왈가불가 한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어 협조를 구하는 대신 아예 언론에 제보(提報)하여 기사화 하거나 방송을 통해 여론화해서 시정(是正)하도록 했었다.
세 번째는 중앙초등학교 폐교부지 활용 문제였다.
중앙초등학교부지가 공원으로 조성되지 아니하고 상업시설로 매각할 계획이라는 내부에서 얻은 정보에 매우 실망했다. 가까운 거리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경상감영공원이 있으나, 부지의 소유가 민간이 아니고 교육청이라는 점과 와룡산으로부터 달성공원, 경상감영공원, 신천, 국채보상운동기념이 연결되어는 동・서의 녹지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 학교 출신으로 경주대학교 조용기 교수와 시민운동가인 안종효 님에게 1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 중앙초등학교가 흔적도 없이 상업시설로 대체되는데 대해 수수방관하고 있어서야 되겠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이 두 분이 나서서 대구YMCA, 대구녹색연합, 대구여성회, 대구여성의 전화, 대구환경운동연합, 새 대구 경북시민회의, 영남자연생태보존회, 우리사회복지연구회, 참여광장, 한국소비자연맹 대구경북지부 등이“중앙초교 문화공간화 및 공유지 녹색공간화 범시민협의회”를 결성하여 시와 교육청을 설득 마침내 매각 방침을 철회시키고 공원(公園)을 조성한 곳이다.
이 사례는 시민․환경단체가 대안(代案)을 가지고 관계기관과 끈질기게 협상하여 얻어낸 수확물이자 NGO와 시정부의 첨예한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한 기념비적(記念碑的)인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사업이 재개되었지만 새만금간척사업이나, 경부고속전철의 천성산 통과 방법을 두고 NGO와 중앙정부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많은 국고(國庫)가 손실된 것을 보면 비록 규모는 작지만 2・ 28기념 중앙청소년공원조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부규율을 어긴 나의 밀고(密告)가 도심지의 금싸라기 같은 땅을 시민 휴식공간으로 바꾸었으나 칭찬 받아야 할지 배신자로 지탄받아야 할 일인지 아직 모르겠다.
깔끔하게 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이 옛 중앙초등학교 자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흔적은 개교(開校) 당시 심었다는 등나무 두 그루뿐이다.
원래 4 그루였으나 2그루는 만촌동 새로 지은 학교로 가져가고 2 그루만 남았다. 2004년 봄 현존하는 등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어찌된 영문인지 줄기가 가늘어 까닭을 몰라 김응서 공원관리장에게 물었더니 태풍 ‘매미’ 때 부러졌으나 다행히 곁가지가 남아있어 떼어 심은 것이라고 했다. 하마터면 단 하나뿐인 100년 역사의 주인공인 등나무가 사라질 뻔 했다.
오늘 2,28기념일을 맞아 그 때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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