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새봄의 전령사 흑룡금매

이정웅 2007. 2. 23. 17:42

 

 2009, 3, 15 국채보상공원 홍매

 

 

매화(梅花)에 이런 품종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이 품종을 소개한 사람은 흑룡금매(黑龍金梅)라고 했다.

  우리 선조들은 매화를 사랑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아직도 찬바람이 부는데도 청초한 꽃을 피우며 거기에다 은은한 향기까지 더하니, 정서가 풍부하고 성품이 고결한 선비들이 어찌 좋아하지 않으랴만 지금은 꽃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대체로 매화 향(香)을 즐기기엔 모두가 너무 바삐 살아가고 또한 시대도 달라져 매화 말고도 원예종(園藝種)의 화려한  꽃들이 많이 도입되어 종류가 다양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흰색은 화려하지 못해 원색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전통 매화는 초라한(?) 모습으로만 보여 지는 꽃이기도 한 것 같다. 나 역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꽃 한 포기 꽂을 공간이 없고, 바쁜 일상을 살고 있으니 꽃을 완상(玩賞)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길 시간도 없으니 말이다.

또한 큰 도시를 꾸미는 일에 매 달리다 보니 어지간히 자극적이 아니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따라서 매화라고 하더라도 원색, 주로 붉은 색 매화를 많이 심어 무감각한 도시민들의 눈을 번쩍 뜨게 하기에 오히려 더 골몰했었다. 이른 봄 강릉(江陵)을 갔다가 울진 쪽으로 내려올 기회가 있었다.

왼쪽 차창으로 들어오는 넓고 푸른 동해 바다, 수평선 가까운 곳에 점처럼 떠 있는 고기잡이 배, 밀려오던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泡沫), 빨갛게 혹은 파랗게 지붕을 인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어촌, 한적하기 그지없는 바닷가 모래사장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이제 막 봄기운으로 물들려는 산천을 감상하면서 돌아오는데 매화리(그 곳이 울진군의 무슨 면인지 지금도 모른다) 가까운 곳에 오니 시선을 끄는 가로수가 있어 자세히 보니 붉은 꽃이 만개한 매화였다.

  그 이른 봄, 절기로는 입춘이 지났어도 삼라만상이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생동감 넘치는 붉은 매화는 나를 흥분케 했다.

  이 매화를 대구에도 보급해 보기 위해 다음 해 울진군에 양해를 구하고 직원을 보내 가지를 끊어 와서 접을 붙여 방촌동 소재 묘포장에 심었으나 접(接)붙이는 기술이 부족했던지, 아니면 사후관리가 잘못되어서인지 실패했다.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민들에게 봄이 왔음을 식물을 통해 알리는 일만은 녹지공무원의 의무라는 생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전라도 구례에 있는 모(某) 농장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도 이른 봄이었다.

  지리산 정상은 흰 눈을 이고 있는데 농장 한가운데 매화나무로는 보기 힘든 큰 나무가 붉은 꽃을 올망졸망 매달고 서 있었으며 향기도 좋았지만, 흰눈의 지리산과 붉은 꽃이 묘한 대조를 이루어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잊지 못해 매화를 좋아하는 정 여사에게 말했더니 부지런한 정 여사는 언제 거기까지 갔었는지 삽수(揷穗)를 채취해 와 농장에 접목을 해 놓았다.

  3년여가 지났을까.

  어느 정도 자란 것을 확인하고 중구청으로 하여금 예산을 지원해 줄 터이니, 사서  새로 단장한 경상감영공원과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심도록 했다. 그리고 얼마를 지난 후 나무 심은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현장을 가 보았더니,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시민들이 가까이서 꽃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공원  앞쪽 잘 보이는 곳에 심어야 하는데 뒤쪽 후미진 곳에 심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까닭을 물으니 시장한테 혼날까 봐 일부러 구석진 곳에 심은 것이라고 했다. 하기야 두 공원에 대한 문 전 시장의 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었고 뿐만 아니라, 큰 나무를 좋아했으니 아직 어린 묘목을 눈에 잘 띄는 곳에 심어 놓으면 혼날 것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든 나는 큰 나무는 이제 어지간히 심어 공원분위기와 어울리게 자라고 있으니 앞으로는 시민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 찾아도 즐겁도록 할 필요가 있으므로 계절별로 꽃이 피는 화목류(花木類)를 더 심어야 하며, 그 일환으로 비록 나무는 어리지만 이른 봄에 분홍빛 꽃이 피는 아름다운 흑룡금매를 심겠다고  보고(報告)를 했었다. 그런 내용을 자세히 알 리 없는 관리사무소 직원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많은 시민들을 즐겁게 할 귀한 매화가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지 못하고 외진 곳에 움츠리고 있는 모습은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 후 나와 같이 근무했던 이상윤 주임(현 두류공원소장)이  공원관리의 책임자가 되어 공원관리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기에 맨 먼저 부탁한 일이 이들 매화를 시민들이 보기 좋은 장소에 옮겨 심도록 하는 일이었으며, 실제 그렇게 했다.

2004년 2월 마지막 날 꽃 핀 모습을 보기 위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찾았더니 평소 알고 지내는 조선일보 이재우 기자가 보도 자료로 쓰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으며, 나들이 나온 많은 시민들 역시 일찍 꽃이 핀 흑룡금매가 신기한 듯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어 의도한 바와 같은 장면들이 눈앞에 전개되어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자리를 잡아 크게 자라면  꽃도 더 많이 달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분위기도 더 좋아져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경상감영공원의 명물(名物)이 될 것이다.

푸른 대구 가꾸기에 초석을 놓으신 이상희 전 대구시장님은 역저(力著)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에서 매우 재미있는 통계를 발표했다.

즉 삼국시대부터 조선조 말까지 한시(漢詩)를 집대성해 놓은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수록된 한시 5,270수를 분석해 보니 꽃을 제목으로 쓴 시는 모두867수, 꽃의 종류는 모두 58종이었다고 한다.

이를 다시 출현 빈도 10위까지의 꽃 이름과 출현 횟수는 뽑아보았더니 매화155회, 도화(복숭아꽃)133회, 국화 102회, 연 82회, 행화(살구꽃)58회, 노화(갈대꽃)50회, 난36회, 이화(배꽃)20회, 해당(해당화?)11회 순 이였으며, 이와 달리 ‘현대시사전’ (1994)에 수록된 15,784편의 현대시 중에서는 꽃을 제목으로 쓴 시가 426수, 등장하는 꽃이 57종으로 장미35회, 해바라기31회, 국화29회(들국화12회), 목련29회, 난24회, 코스모스20회, 진달래16회, 연꽃16회, 모란16회, 달맞이꽃12회 순이었다고 한다.

이 통계를 통하여 조선조 이전과 현대 사람들의 두 가지 다른 꽃 문화를 이해 할 수 있다.

첫째는 문인들이 좋아했던 꽃이 조선조 이전에는 주로 매화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장미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전체 글 중에서 꽃을 제목으로 한 시가 차지하는 비율이 조선조 이전에는 16%나 되었으나, 현대에는 2%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통계는 현대인들의 정서가 그 만큼 비식물적(?)으로 매말라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