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이인성과 해당화

이정웅 2007. 2. 8. 09:32

 대구 두류공원 내 이인성상

 해당화

 

이인성의 작품 해당화

 

 

 

 공원관리사무소 최태성님의 보호로 잘 자라고 있는 해당화 새싹 


 

몇 년 전 한 지역 일간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모 미술전문 계간지가 현역 중견 미술평론가 13명에게 우리 나라의 유화 ‘베스트10’과 작가의 인기도를 조사했더니 대구출신 청정(淸汀) 이인성(李仁星 1912~1950) 화백의 작품 “경주산곡에서(1935년 작)”가 1위, “어느 가을날(1934년 작)”이 7위로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기도에서도 김환기(1913~1974)와 더불어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서울 생활을 제외하고는 주로 지방인 대구에서, 그것도 일제 강점기에 활동을 했던 것과 유화(油畵)가 이 땅에 자리 잡은 이후 수많은 작가가 배출되었고, 작품이 발표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1위에서 10위까지 중 하나의 작품만 선정되었어도 대단한 영광인데 청정은 2작품이나 포함되었기 때문에 더욱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국민화가로 불리는 이중섭(1916~1956)은 대표작 “흰소”가 2위로 뽑혔을 뿐이었다.

그러나 미술계의 이러한 평가와 달리 1999년 1월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이 먼저 선정(이인성은 2003년 11월 문회인물)되고 정부가 대대적인 홍보를 했음은 물론 그를 사랑하는 기념사업회에서는 서울 유명화랑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나는 이러한 분위를 보면서 천재화가 청정을 더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문화예술회관 기관지인 ‘대구문화’에 청정을 사랑해야 할 이유를 짤막하게 기고(寄稿)했다.

그 해 대구광역시와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이인성미술상” 제정문제가 제기되었고 비판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賞)이 제정되어 올해로 벌써 7회를 맞는다. 당시 문화예술과에 근무하며 이인성 미술상 제정 실무를 담당했던 김 모 사무관(서기관으로 정년퇴임)에 의하면 일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사들에게는 내가 기고했던 대구문화를 나누어 주며 설득 했다.

미술과는 거리가 나는 본디 산림공무원이었다. ‘푸른대구가꾸기’가 주 업무였던 만큼 많은 나무를 심었고, 또한 심는 것 못지않게 노거수(老巨樹)보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우렸다.

왜냐하면 오래된 나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중한 자원이 시민들의 인식부족으로 잘려 나가는 것이 애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거수를 보호 하기위하여  ‘역사 속의 인물과 나무’라는 타이틀을 내 걸고 보호운동을 펼쳤다. 즉 종로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를 “최제우나무”라고 명명한 것 등이 그 것이다. 이 나무는 인내천(人乃天) 즉 ‘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사상을 주창(主唱)하다가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진 동학의 교조(敎祖) 수운 선생의 고뇌를 마지막까지 지켜 본 나무이기 때문이다. 청정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의 작품 “계산동성당”을 보면 그림 중에 나목(裸木)한 그루가 있다. 그림 속의 나무를 ‘이인성나무’로 명명(命名)하고 까닭을 적은 안내판을 설치했다.

청정의 손녀 이민선 양이 할아버지의 자취를 미술관과 그림의 배경이 된 대구와 경주를 오가면서 쓴 “우리 할아버지 이인성(2003)”을 보니 ‘성당을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는 나무(할아버지 이인성 나무)를 꼭 안아보았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며 이인성을 알리는데 조그마한 기여를 하고 했구나 하는 생각 들어 기뻤다.

이인성 역시 여느 화가와 마찬가지로 나무를 자주 등장시켰고 ‘사과나무’ ‘복숭아’ ‘해당화’는 단일 수종의 나무를 화제(畵題)로 그렸다. 특히 이들 중에서  “해당화”는 평론가가 ‘조선미전 마지막 회에 출품한 이 작품은 회심의 역작인 듯하다. 그러나 바닷가 언덕과 세 인물의 묘사에서 보이는 사실적 묘사는 전쟁화를 연상시키며, 색채 또한 1930년대 중반 작품에서 보였던 강렬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고전적인 화풍이 자리 잡고 있다.’ (신수경: 한국미술연구소 연구원)라고 하여 그의 그림 세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나는 이왕이면 이 나무를 두류공원 인물 동산 내의 청정 동상(銅像) 옆 공지에 한 그루 심고 싶었다.

해당화(海棠花)는 이름이 말하듯 바닷가 모래밭에 잘 자라는 낙엽 활엽 관목이나 육지에서도 생육이 양호하며 늦은 봄부터 시작해 초여름까지 선홍색(鮮紅色) 꽃이 피는 줄기에 가시가 있는 나무다. 어떤 일로 당시 대구미협의 김일환 회장을 만나 내 생각을 전했더니 좋다고 하여 용기를 얻었다. 공원관리사무소 김 계장에게 뜻을 전하고 여가를 봐서 구덩이를 파 놓으면 내가 나무를 구해 심겠다고 하였으나, 시간이 흘러도 시행되지 않아 그의 무성의에 조금은 서운해 하며 다시 이야기를 했더니 인부들에게 묘목까지 구해 주며 심으라고 했는데 아마 딴 곳에 심은 것 같다고 해 섭섭했던 마음이 누그려졌으나 그나마 딴 곳으로 자리를 옮겨 실행을 못하고 있었다. 미련(未練)을 버릴 수 없었던 나는 옛 동료였던 최태성 님에게 다시 부탁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구덩이를 알맞게 파 놓았다. 심는 시기를 놓지 지 않으려고 산림조합이 개설한 공설 나무시장은 물론 서문시장 주변의 노점상까지 뒤졌으나 허탕을 치고 마침내 하양에 갔더니 거기에서도 몇 집을 거쳐서 마침내 묘목을 파는 집을 발견했다. 그러나 또 다시 애로에 부딪혔으니 이번에는 한 그루는 팔지 아니한다고 한다. 소매를 하지 아니하고 다섯 그루 한 묶음을 도매로만 판다고 했다.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먼 길을 가서 헛걸음 칠 수도 없고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한 묶음 그대로 사서 심으려고 값을 물었더니 내 간절한 소망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지 정동환(한국종합종묘)사장은 그대로 한 그루를 주었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던 가 돈 한 푼도 지출하지 아니하고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이튿날 (2006년 3월 31일) 아침 구덩이를 다듬어 심고 물을 주니 겉보기와 달리 배수(排水)가 잘 되지 않았다. 공원을 찾을 때마다 들러 생육상태를 살펴보았으나 가져올 때 간수를 잘 못해서 그런지 줄기가 말라 긁어보았더니 뿌리부분은 용하게도 살아 있는 것 같아 안도하며 북을 돋우어 주었다. 이런 노력의 덕분인지 새로 잎이 돋아나 기뻤으나, 그 것도 잠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의해 밟혔는지 아니면 비둘기들이 어린 싹을 쪼아 먹었는지 새로 돋은 잎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들은 아내가 새로 묘목을 구해 주어 다시 심어 놓았으나 이 나무 역시,  죽어 이상윤 공원관리소장과 이동춘 계장에게 부탁했더니 2007년 3월 하순 다시 심었다. 

그런데 이 무슨변고련가? 누가 일부러 그랬는지 줄기를 모두 잘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위대한 화가에게 해당화 한 그루 헌수하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가. 다시금 낭패감에 졌었다. 그러나 천우신조이련가 새싹이 돋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혼자 탄성을 지르며 공원에 근무하는 동료 최태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 누가 밟기라도 한다면 지난번처럼 저 어린싹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 아닌가 나는 보호 울타리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며칠 후 현장을 찾았을 때 아주 튼튼 한 쇠로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처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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