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팔공산의 차나무

이정웅 2007. 2. 4. 23:59

 파계사 성전암 성철스님이 수도했던 유서 깊은 암자

 팔공산 고지대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자라고 있는 차나무

 올 겨울이 따뜻해서 그런지 비교적 싱싱한 잎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고향 밀양에 있는 노모(老母)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뒷바라지 하기 위해 임금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리가 함양 군수였다. 영산 지리산 자락인 함양은 산 좋고 물 좋고 인심이 또한 좋은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에 이미 최치원 선생이 태수로 와서 홍수로 인한 피해로부터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호안림(護岸林)을 쌓는 등 선정을 펼친 곳이다. 점필재 선생이 군정을 펼치면서 부딛힌 첫 고민은 해마다 조정에 올려 보내는 진상 차(茶)였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차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신라 헌강왕 2년(828)이었다고 한다. 견당사로 중국에 갔던 김대렴(金大廉)이라는 사람이 씨를 가져 와 하동, 구례, 산청, 함양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함양에는 응당 차가 생산되는 줄 알고 진상토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황과는 달리 함양에서는 차가 생산되지 않았었다. 따라서 차를 진상하기 위해서 해마다 이웃 하동 등에 가서 막대한 양의 곡물과 차를 교환해야 하였으니 주민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점필재가 선택한 방법은 차를 생산해 보자는 것이었다. 고을의 몇 사람과 함께 차 종자를 찾아 나섰다. 마침내 씨앗을 구해 백여 평의 차밭을 만들어 진상에 필요한 양을 직접 생산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이는 아마 우리나라 관영(官營) 다원(茶園)의효시가 아니었을까 한다. 다원을 만든 그는 소회를 한 편의 시로 남겼다.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지리산을 말함=필자)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대숲 밖 거친 동산 일백여 평의 언덕

자영차(紫英茶), 조취차(鳥嘴茶)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 같은 명차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었던 함양 다원은 폐허로 변했고 기념 표석만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다. 자기 잇속만 챙기는 오늘날의 관료와 달리, 오로지 백성을 사랑한 선생의 애민정신이 무색해지는 것 같아 무척 아쉽다.


10여 년 전 나는 점필재 선생의 이런 훌륭한 의도와 다른 목적으로 팔공산에 차나무를 심었다. 다도보급에 열성을 보이던 최정수 선생이 집에서 기르던 차나무를 기증한 것을 받아 심었던 것이다.

다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나무를 다루어 왔던 나는 차나무가 전라도 보성이나 경남의 하동 같은 따뜻한 곳이 적지인줄은 안다. 그러나 일부는 양묘사업소(대구수목원의 전신)에 보관해 두되 일부는 팔공산의 부인사나 성전암의 양지 바른 곳에 심도록 했다. 특히 차를 즐겨 마시던 성전암의 철웅 스님은 생각이 나와 같아 한번 시도해 보자고 했다. 내가 이런 시도를 감행한 것은 식물마다 건조(乾燥)나 추위 등 외부의 환경을 뛰어 넘어 생존 하려는 습성이 있을 뿐 아니라, 지구 온난화 등의 여건 변화로 만약 경우 살아남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다인들이 즐겨 먹는 보성이나 하동차 와는 전혀 다른 맛과 성분의 차를 팔공산에서 생산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무등산 수박처럼 팔공산 특산의 명다(名茶)를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같은 것도 있었다.

그 후 나는 다른 일에 매달리다가 퇴직을 했다. 이 차나무 말고도 나는 나름대로 팔공산 특산품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름철 순환도로변에서 아주머니들이 팔고 있는 포도 역시 재직 중 내가 관여해 조성한 포도원의 산물이다.

때는 80년대 초 이른 바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이었다. 팔공산 자락 용진 마을 출신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다. 일대에는 큰  가뭄이 들어 벼 수확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 때 해마다 되풀이 되는 가뭄을 대체할 방안으로 마련된 방안이 과수심기였다. 농촌진흥청 연구관들이 내려와 토양과 기후, 지하수 유무를 확인한 결과였다.

포도와 복숭아가 추천되었으나 포도를 희망하는 농가가 더 많았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새로 심게 되는 포도, 복숭아 재배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었고 묘목은 시가 무상으로 보급했다. 한·칠레 무역협정으로 최근에는 수익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이 곳은 산간지역이라 김천이나 고산 등지에서 생산된 포도가 자취를 감출 즈음에 출하되어 오히려 가격이 높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팔공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농촌체험이 가능하도록 원두막도 지어 줄 계획이었으나 주민들이 농로를 확보해 주지 아니하여 포기하였다. 나는 포도 이외 청정 미나리도 보급하고 싶어 시험재배에 따른 예산을 확보하여 농업기술센터에 배정 기술 지도를 하도록 하였으나 웬 일인지 더 이상 확대되지 아니하였다. 특히 청도의 한재미나리가 고가로 팔리고 많은 시민들이 미나리를 먹기 위해 일부러 그 곳을 찾는 다는 보도를 보면 더 아쉽다.

다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다. 최근 팔공산을 찾아 몇 분을 만나보았더니 교장 선생을 역임 하다가 은퇴 한 후 팔공산 자락에 거처를 마련한 김종욱 박사나 공산농협장을 역임하며 공산지역 농민들의 소득 증대에 앞장서다가 퇴직한 한상일 님이 차나무심기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10여 년 전 내가 시도했던 일을 두 분이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 때 내가심은 차나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2007년 2월 3일 성전암으로 향했다. 해박한 지식과 우렁찬 목소리로 산이 쩡쩡 울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법문을 하든 철웅 스님도 병석에 누운지 오래라 어느 곳에 심었을까 혹시 베어내지는 않았을까 얼어 죽지는 안았을까 머리를 어지럽혔다.

암자 앞 큰 전나무의 사진을 찍기 위해 잘 다듬어진 기존의 길 이외 옆길로 들어섰더니 뭔가 엄동설한에도 푸르게 자라는 것이 있어 보았더니 아 차나무가 아닌가? 10여 전에 내가 주도해서 심은 차나무였다. 기쁨이 헤아릴 수 없이 컸다. 사진을 찍고 암자로 향했다.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던 암자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종전과 같은 부처님을 모시고 있을 뿐일 터인데 세상인심에 또 한 번 놀랬다.

낯모르는 스님께 인사를 하니 기꺼이 방안으로 들어오라 하며 차를 권한다. 차나무 이야기를 하였더니 성해(性海)스님 역시 하동 쪽에 살아서 차를 좀 안다고 하였다. 일꾼들이 베지 않도록 나무를 잘 보호해 줄 것과 기회가 되면 차 맛이 어떤지 알아보아 달랐고 하였으나 차라는 것이 잎을 따서 그냥 말려 먹는 것이 아니라, 얼마의 온도에 몇 번 굽는 방법이 따로 있어 그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뒷날 아는 사람에게 맡기자고 약속하고 절문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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