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묘소 주변의 소나무 수관, 똬리를 튼 모습을 하고 있다.
퇴계선생묘소
퇴계선생이 태어난 태실
영남사림파를 공부하고 있는 아우 만농(晩儂)이 이제야 가보았느냐고 했지만 사실 나는 그 동안 공무(公務)로 바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이제껏 대구의 정체성 찾기에 매 달여 온 관계로 동방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을 뵈올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 몇 분과 함께 대구를 출발 정신문화의 수도로 불리는 안동을 찾았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던 날씨가 늦은 방문객을 꾸짖기라도 하려는 듯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돌았다. 군위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곧바로 달려가서 닿은 곳은 이육사의 생가 자리였다. 여섯 형제가 하나 같이 뚜렷한 인물로 자라서 집의 이름을 육우당(六友堂)이라 했다는 기념비와 대표작 청포도를 형상화 해 놓은 시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 넓지 않는 들판, 낙동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이 곳에서 태어나 대구로, 서울로, 북경으로 떠돌아다니며 독립운동과 시작(詩作)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불과 1년 앞두고 돌아가신 육사가 태어난 곳은 생각보다 훨씬 외진 곳이었다.
부근에 있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학관에는 이미 다른 단체가 와 있었다. 이렇게 깊은 오지(奧地)에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자취를 찾는 것은 그의 훌륭한 인격과 문학가로서의 삶이 시대를 초월해 존경 받기 때문이리라고 생각된다. 일행은 다른 방문객들과 함께 영상물을 관람하고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선생의 본래 이름은 이원록(李源祿)이였다. 필명 이육사(李陸史)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채포되어 감옥에 있을 때 붙여진 수인 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사실 선생은 시인이기 보다 독립운동가로 더 열정적인 삶을 사셨다.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시대를 살면서 개인의 안락보다는 민족을 위해 더 많은 고뇌를 한 시대정신에 투철했던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에 퇴계 선생의 묘소를 참배했다. 안내판 설명으로 보면 금방 오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가파른 계단을 따라 한참 숨을 헐떡인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도 사양하고, 비문조차도 타인이 쓰면 사실을 부풀려 적을 것이 염려되어 스스로 썼다는 묘비(墓碑)와 문인석과 동자석, 제수를 진설하는 상석이 있을 뿐 명성에 비하면 퍽 소박한 유택이었다. 선생은 중국에서 일어난 성리학을 중국보다 오히려 더 논리정연하게 체계화 시켰다고 한다. 일행 중 풍수에 관심이 있는 분이 좋은 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도래솔의 이상(?)한 모습에 오히려 눈이 더 갔다.
전면(前面)의 소나무들이 위로 자라지 아니하고 옆으로 뻗어 자라기 때문이었다. 즉 수고(樹高) 성장을 멈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을 초월한 이런 자람은 결과적으로 그늘을 만들지 않아 봉분을 덮고 있는 잔디가 잘 자라 묘지관리가 한결 용이 하게 해 주었다.
숭조사상이 깊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분에 걸맞게 않게 호화분묘를 쓰거나, 석물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는 등 묘지관리에 많은 신경을 쓴다. 특히 봉분을 덮은 잔디가 토양 등 다른 조건으로 잘 자라지 아니하여 무척 애를 쓰는 데 선생의 묘소는 그늘이 들지 않도록 일부러 소나무 줄기를 자른 것처럼 생장(生長)이 멈춰 햇볕을 많이 받은 잔디가 너무나 잘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조경공사에 소나무가 많이 심어지면서 좋은 나무를 고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수피가 붉고 키가 크면서도 수관(樹冠)이 넓게 퍼진 것을 골라야 하는데 그런 나무가 잘 없다는 뜻이다. 대구의 새로운 명소가 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큰 소나무는 달성군 구지면의 김해 김씨 창동 문중의 도래솔을 기증받아 옮겨 심은 것이다. 시(市)가 필요해서 얻어 온 것이긴 하지만 문중 어른들이 쉽게 동의한 이유는 나무가 너무 크게 자라 그늘로 인해 잔디가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퇴계 선생 묘소 주변의 도래솔은 단 몇 그루를 제외하고는 한결 같이 높이 7~8m 에서 자람을 멈추고 수관부가 똬리를 튼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무도 선생의 고매한 학덕을 흠모(?)한 나머지 스스로 자람을 멈추어 묘소의 잔디가 잘 자라도록 배려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신기한 현상을 수목학을 전공하는 홍성천 교수께 여쭈어 보았더니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우라고 한다. 첫째, 왜가리 등 새가 앉아 가지를 다치거나, 둘째, 나무가 자라라는 지역의 토심(土深)이 낮아 더 이상 양분 조달이 어려워 수고 생장을 멈췄거나, 셋째, 일정한 방향으로 부는 강한 바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수고생장 대신 옆으로 자라는 특성으로 요약된다고 했다.
이러한 견해로 볼 때 선생의 묘소는 앞을 흐르는 계곡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고, 토심 또한 낮아 이러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생겨난 현상이 아닌가 하나, 어떻던 이런 과학적인 검증과 달리 선생을 존경하는 소나무의 신성(神性)이 유택에서 쉬고 있는 선생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배를 마치고 발길을 돌려 태실(胎室)로 향했다. 이곳 역시 경관이 특이하게 빼어나거나 감탄이 절로 나올 수 있을 만큼 수려한 곳은 아니었다. 경상도 북부지방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시골이었다. 그러나 태실(胎室)은 달랐다. 방을 돌출시키고 소박하지만 난간을 설치하여 건물을 돋보이게 한 점이 일반 사대부집 안채와 달라보였다. 퇴계는 이 곳 온계리에서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숙부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었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전념하려고 하였으나 주변 특히, 어머니의 권유로 향시(鄕試)를 거쳐 33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 벼슬길에 올랐다. 승정원 부정자, 홍문관 부수찬 , 부교리 등을 거쳐 41세 때에는 강원도, 충청도지방의 암행어사로 활동했고, 47세 때 풍기 군수가 되어 안향(安珦)을 모신 백운동사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이가 곧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그 후 공조 · 예조 · 이조판서와 선비들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벼슬이라고 하는 양관 대제학을 거쳤다. 그는 관리로 나아가 일을 하기보다는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시다가 6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깊고 오묘한 학문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영향을 끼쳐 에도시대에 기몬학파와 구마모토학파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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