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체천단, 최근 필자에 의해서 유구가 확인되었으나 주변에 설치된 철조망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웠다. 그러나 팔공산공원관리사무소의 적극적인 노력과 군부대의 협조로 내년 쯤에는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팔공산순환도로 단풍나무 처음 심을 때에는 예산낭비라는 많은 지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명물이 되었다.
대구의 젖줄인 금호강과 대구의 상징인 팔공산, 금호강의 풍부한 수량은 한 때 대구를 전국 제일의 섬유도시로 각광을 받았다. 따라서 강물이 오염되는 등 문제가 많았으나 지금은 수질관리를 잘 하여 불과 반세기만에 2급수로 깨끗해 졌다.
민족의 영산 팔공
나는 팔공산을 민족의 영산(靈山)이라고 부른다. 백두산처럼 정상이 구름으로 덮여 신비로움을 간직한 산이거나, 천지(天池)라는 신령스러운 못이 있거나, 아니면 한반도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백두대간의 시발점이라는 지형적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높이가 불과 1,192m의 팔공산을 두고 감히 민족으로 영산이라고 부르는 데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여느 산처럼 봄이면 진달래, 여름이면 우거진 숲, 가을이면 붉은 단풍, 겨울이면 휜 눈,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것은 물론 적당한 크기의 바위나,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계곡, 다양한 동·식물 등 산(山)이 가져야할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이외 호국의 정신과 불교의 성지, 문화재의 보고라는 다른 산이 가지고 있지 못한 특별한 의미가 깃든 산이기 때문이다.
팔공산의 유래(由來)
유래가 많은 것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이다. 유래가 많다는 것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도 되기 때문에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신라 초에는 공산(公山) 또는 부악(父岳)으로 불렀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 한 이후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전국의 주요 산 중에서 큰 제사 즉 대사(大祀)와 그 다음 규모의 제사 즉 중사(中祀)를 지내는 산을 구분하여 삼산오악(三山五嶽)을 지정했는데 이 때 대사(大祀)를 지내는 곳은 삼산(三山)이라 하여 수도 경주와 가까운 경주의 낭산, 영천의 금강산, 청도의 오리산을, 그 이외 중사를 지내는 곳으로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지리산(남악), 태백산(북악)과 팔공산은 중악(中岳)으로 했다. 팔공산이 중악으로 불리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지리적으로 통일 신라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뜻에서 장차 대구로 천도(遷都)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689년(신문왕 9)천도를 시도했었으나 기득권층의 반대로 포기했다. 이후 대체적으로 공산으로 불려왔는데 공산에 팔(八)자가 더하여 팔공산(八公山)이 된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이야기가 전해온다.
0,여덟 장수가 순사했다는 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유래다.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금은보화 등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귀로(歸路)에 접어들고, 개경에 있던 태조 왕건은 비보를 접하고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정예기병 5,000명을 이끌고 남하하다가 조우한 곳이 바로 팔공산이다. 서로가 쏜 화살이 내를 이루어 전탄(箭灘), 피신해서 오른 산이 왕산(王山), 패한 재가 파군재(破軍峙), 도망가며 혼자 앉았다는 독좌암 등의 지명이 유래될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왕건이 결국 패하고 만 전투였다. 이 때 8장수가 전사했다고 해서 그들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팔자를 더했다는 것이 달성군지의 기록이다.
0, 동화사에 팔간자를 모셨다는 설
모악산 금산사의 진표율사가 사지가 찢어지는 처절한 수행을 하여 미륵으로부터 189개의 간자를 얻었는데 그 중에서 8번째 간자 즉 팔간자(八簡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증표(證票)라고 한다. 이것을 법주사에 있는 제자 영심 스님에게 전수한 것을 동화사의 심지스님이 얻어와 모셨기 때문에 팔(八)자를 더해 팔공산이라 한다는 동화사사적기의 기록이다.
심지화상이 영심으로부터 팔간자를 얻어 동화사에 모시는 과정은 <삼국유사> ‘심지계조(心地繼祖, 심지가 진표를 계승하다)’ 편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심지스님 이전의 동화사의 이름은 유가사였는데 832년(흥덕왕 7)심지가 중창불사를 할 때 겨울인데도 오동나무가 꽃을 피워 동화사(桐華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동화사가 미륵을 모시는 사찰이라는 것은 이 인연에 따른 것이다.
0, 군위, 경산 등 여덟 고을에 걸쳐있는 산
워낙 뿌리가 넓게 펼쳐져서 앉자있는 고을이 대구(동구)를 비롯해 경산, 하양, 영천, 신녕, 군위, 칠곡, 등 여덟 고을이라서 유래되었다.
0, 중국의 팔공산에서 따왔다는 설
오대산, 낙가산, 아미산 등 우리나라의 많은 산 이름이 중국과 같은 경우가 많듯이 팔공산도 중국에서 따왔다는 설이다. 즉 중국의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안휘성에 있는 팔공산에서 진(晉)나라 군사와 대회전을 벌였으나 진의 명장 사석(謝石)의 선전으로 대패한 고사가 라말여초(羅末麗初) 태조 왕건과 견훤의 싸움과 비슷해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
0, 원효가 중국승려 8명을 득도 시켰다는 설
원효대사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러자 중국에서 1,000명의 승려가 찾아왔다. 스님은 이들을 이끌고 천성산으로 내원암으로 들어가 수행을 지도해 992명은 득도시켰다. 그러나 8명은 아무리 가르쳐도 득도를 하지 못했다. 마침내 이들을 이끌고 당신이 해골 물을 마시고 도당(渡唐) 유학을 포기하고 한 때 수도했던 팔공산에 데려와 깨우치게 했다고 해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
0, 3분의 성인과 5명의 깨우친 자가 났다는 설
서봉의 삼성암(三聖庵)은 세 분의 성인(聖人)이 나서, 군위 쪽의 오도암(悟道庵)은 다섯 분의 깨달은 자가 나서 지어진 절의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모두 폐사가 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이 다양한 유래들은 각기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사서(史書)에서 8장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팔간자 봉안(奉安) 설 역시 신라시대에 이루진 일이나 조선 초까지 공산(公山)으로 불러진 점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어렵게 하고, 8고을 설 또한 7고을에 불가하고, 중국에서 따왔다는 설, 원효가 8명을 득도시켰다는 설, 3분의 성인과 5분의 깨달은 사람이 났다는 설 등도 고증하기 어려운 사안들이라 딱히 맞아 떨어지는 유래는 없다.
따라서 모든 신화나 전설이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듯이 팔공산 유래 또한 그런 신화들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이런 풍부한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해 주어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가 한다.
팔공산의 경관
일찍이 사가 서거정은 대구의 아름다운 열 곳을 노래하면서 동사심승(桐寺尋僧) 즉 ‘동화사 찾는 중’을 제7경으로. 공령적설(公嶺積雪) 즉 ‘팔공산에 쌓인 눈’을 제9경이라는 시제로 대구10경 중 무려 2경이나 팔공산을 노래했을 만큼 시인묵객들의 찬사가 그치지 아니한 아름다운 산이다.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전해오는 8경이 있을 뿐 아니라, 10경도 있다. ‘팔공산팔경’과 ‘팔공산10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심봉의 흰 구름, 제천단의 소낙비, 적석성의 밝은 달, 백리령의 쌓인 눈, 금병장 단풍, 부도폭포, 약사봉의 새벽별, 동화사 종소리이다. 이상이 기존에 전해오던 팔공산 8경이다.
무심봉은 정상인 비로봉(재왕봉)을, 제천단은 최근 필자에 의해 유구(遺構)가 확인 된 중사(中祀)를 지내던 곳을, 적석성은 공산성을, 백리령은 가산에서 관봉까지의 뻗힌 백리능선을, 금병장은 병풍바위를, 부도폭포는 구(舊)길 절 안내판 부근의 작은 폭포를, 약사봉은 갓바위로, 비정하고 있다. 이 팔경에서 특별히 감동을 주는 부분은 특정지명만 거명한 것과 달리 새벽별, 종소리 등 가슴으로 느끼는 아름다움 까지도 경관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신 팔공산 팔경이라 하여 가볼 수 없는 군부대내에 위치한 곳을 제외하고 불러지는 8경은 다음과 같다. 수태골의 국두림폭포, 병풍바위, 갓바위, 선주암 폭포, 가산바위, 가산 남포루, 중암암(中巖庵), 불굴사 석굴 이다. 최근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것 같으나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만 나열해 구 팔공산 팔경보다 운치가 덜한 것 같다.
이외에도 팔공산 십경이 있는데 구(舊) 팔공산 팔경 중에서 ‘부도폭포를 팔공산비폭’으로, ‘약사봉의 새벽별을 약사봉의 안개’로 고친 것과 ‘미타봉의 일출’ ‘가산성의 낙조’를 추가한 것이 다를 뿐 이다. 어떻던 팔공산은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아 시문을 남긴 명산이다.
팔공산의 자랑
0, 호국의 산이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화랑이 되어 입산수도하던 중 난승이라는 기인을 만나 통일의 비법을 전수받은 곳이요, 통일신라가 제천단을 두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든 곳이며, 신숭겸과 김락 장군이 사지(死地)에 몰린 왕건을 견훤으로부터 살려낸 산이자. 임란 시 지역의 의병들이 공산성에서, 사명대사가 동화사를 본부로 승군을 이끌고 왜와 싸운 곳이요, 한국동란의 마지막보루이자 반격의 거점이 되어 나라를 지켜낸 산이다.
전국의 어느 산이 있어 이처럼 호국의 혼이 담긴 산이 있으랴.
0, 불교의 성지다.
동화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타락해진 고려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이곳 거조암에서 전국 최초로 정혜결사를 시작해 승풍(僧風)을 바로잡고 이어 조계종을 오늘날 불교의 가장 큰 종파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25교구본사 중 9교구본사인 동화사와 10교구본사인 은해사가 있으며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영험이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참배객이 찾아 염불소리가 주야로 끊이지 않는 곳이다.
0, 문화재의 보고이다.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산세로 많은 국민이 찾는 설악산은 경관은 뚜어나다 하드라도 국가지정 보물은 2 점 밖에 없다. 그러나 팔공산은 동화사 한 절에만 6점이 있으며 그 외 파계사나 은해사 등 산내 다른 절이나 암자 등이 보유한 것을 합치면 20여 점이 넘는다. 특히 제2석굴암으로 알려진 삼존석굴과 거조암 영산전은 문화재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국보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려시대 목조건물로 부석사 무량수전을 들지만 거조암 영산전은 무량수전보다 1년 먼저 지어진 건물이다.
맺는말
이외에도 자랑거리는 많다. 최근 동화사가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태희능과 함께 동아시아 10대 관광명소로 선정되었다. 또한 선덕여왕의 원찰인 부인사는 판각기술이 팔만대장경보다 더 뛰어났다는 초조대장경이 보관되었던 호국의 사찰이다. 또한 방짜유기박물관이 건립되어 전통유기제품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높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팔공산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문학, 음악, 조각 가 많은 예술가들이 속속 거주지를 팔공산자락으로 옮기고 있다. 제천단을 흉물스럽게 둘러싸고 있어 시민들의 접근을 어렵게 했던 철조망도 곧 걷힐 예정이다.
특히, 순환도로와 팔공로의 가로수는 전국제일의 수준이다. 공산터널에서 백안 삼거리까지 가을을 노랗게 물들게 하는 은행나무는 당시 문 시장이 직접 수종을 골랐을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가꾼 길이다. 또 단풍구경 철 먼 곳까지 가는 시민들의 수고나 경비를 덜어주기 위하여 일부러 그 쪽 지역의 단풍나무를 구해 심기도 했다. 그러나 심을 당시 시민들로부터는 예산낭비다. 대통령을 배출한 고장답게 이런 데까지 나라 돈을 흥청망청 쓴다는 비판도 있었다.
지난 시정부에서는 팔공산 주변을 공원보호구역으로 묶어 지주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었으나 다행히 난개발은 방지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꾼 팔공산이 공원보호구역은 이미 풀렸고, 공산댐을 비롯한 상수도보호구역도 조만간 풀릴 예정이어서 이후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민족의 영산 팔공산을 잘 가꾸는 것인지 뜻 있는 시민들의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지역은 해당지역을 상징하는 산을 지키기 위해 무려 200여 개의 시민단체가 감시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팔공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단체는 전무한 것이 현 실정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이러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과 풍부한 전설을 어떻게 엮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할 것인지 시나 자치구의 적극적인 자세가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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