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원군 옥산면에 있는 하원군 정수충의 영정(충북 기념물제 159호)
대구시 동구 백안동 하동정씨 묘역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정수충의 묘
하동정씨 시조 고려 좌정승의 단소
명문 하동정씨(河東鄭氏)가 팔공산 자락에 뿌리를 내려 무수한 가지가 뻗어 나가며 번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시내에서 아양교를 지나 불로동을 통과하여 파군재에서 오른 쪽 길로 접어들면 터널이 나오고 이내 널따란 들판이 전개되는가 하면 이어 백안 삼거리에 다다른다. 동쪽으로 가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영험 있는 갓바위가 있고 좌회전하여 동화사를 알리는 표석의 지시 방향대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500미터정도 올라가면 길 오른 쪽에 서당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있고 그보다 더 큰 돌에 ‘하동정씨도선산 입구’라는 표석이 서 있다. 이 곳에 내려 마을 한가운데 잘 정비된 길을 따라 가면 고개가 나온다. 이 곳의 오른 쪽에 본관이 하동(河東)인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 공의 유허비가 우뚝 서 있다. 비문을 윤보선 전 대통령이 쓴 것으로 보아 이 분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이 비를 보고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청백재라는 큰 재실이 나오는데 그 뒷산에 하동정씨의 시조로부터 8세에 이르기까지 유택(幽宅)이 자리 잡고 있다. 팔공산이나 동화사를 가기 위해 수백 번 이 마을 앞을 지나다녔고 팔공산을 알기 위해 골짝 골짝을 거의 안 누빈 곳이 없다싶었는데 일대가 하동정씨의 성역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하동정씨가 팔공산 자락에 깃들게 한 주인공 정수충은 1401년(태종 1) 개성에서 태어분이다. 그가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5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옛 집이 있던 대구부 해안현 삼태동(오늘 날 동구 방촌동)으로 돌아오자 함께 내려와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성장했다. 1422년(세종 24) 아버지가 병으로 눕자 대변을 직접 맛보며 정성을 다해 간병(看病)했다. 그러나 그의 정성어린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니 예법에 따라 엄정히 장례를 치러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1433년(세종 25) 여흥민씨 보흔의 딸과 혼인하고, 1445년(세종 27) 4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환관을 가르치는 선생에 선발되어 공직에 들어섰다. 그 때 세종(世宗)이 재기(才氣)와 덕을 겸비한 선비로 하여금 왕자 영응대군(이름은 담, 세종의 8남)의 스승을 삼고자 하니 조정에서 공(公)이 천거되어 마침내 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공의 ‘경서와 사기(史記)에 대한 강의를 듣고 그 소감을 말하라. 하시니 모든 것에 정통하고 쾌히 해답을 하자. 수양이 어버이 세종에게 보고하기를 정수충은 학문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덕까지 갖추어 사표가 될만합니다.’ 하자 세종은 기뻐하며 공을 영응대군의 사부로 명하고 연회를 베풀어 영응대군으로 하여금 사제(師弟)의 예를 행하게 했다. 그 후 문종(文宗)이 아직 동궁일 때도 같이 학문을 논하며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이런 왕자나 세자들과 교분을 쌓고 깊은 학문을 논하자 그들이 아버지 세종에게 공의 사람됨과 학문이 깊음을 아뢰니 세종 역시 경사(經史)를 고를 때 공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1450년(문종 1) 가을 마침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처음 전농주부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문종께 아뢰기를 ‘선왕께서 일찍이 교시가 있기를 정수충이 만일 과거에 오르면 크게 써 보겠다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하니 문종이 ‘누구와 같이 그런 의논을 하였느냐’고 물었다. 이 때 수양이 ‘모든 대군이 다 있었습니다.’ 하자 문종이 그를 서학교수로 승문원 부교리를 겸직하게 하였다. 그러나 문종이 몸이 약해 재위 2년 만에 돌아가시고 조선의 6대왕으로 불과 12살의 어린 나이의 단종이 그 뒤를 이었다.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이 황보 인, 김종서 등 반대파인 원로대신들을 숙청하고 왕위에 올라 그를 따르든 사람들에 대해 각자의 역할에 따라 공훈을 정하니 공은 죄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되었다. 그러나 공은 뚜렷한 공적이 없다며 굳이 사양하며 혼호(勳號)를 내려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공의 성품으로 보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아니하였던 것 같다. 다만 평소 수양과 가깝게 지내며 학문적으로 맺은 인연 때문에 특별히 내린 것으로 보인다. 1463년(세조 9)에는 조선인재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의 최고책임자인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465년(세조 11)집현전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면서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 1) 의정부 좌찬성 종1품에 이르렀다. 이후 얼마 있지 아니하여 중풍으로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자리를 맡지 아니하고도 나라에서 녹을 받는 벼슬인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그러나 그 해 가을 마침내 69세로 이승을 마감했다. 선영하에 예장을 하니 일대 10 리의 논밭과 임야를 나라에서 사패지(賜牌地)로 주었다. 또한 시호를 내리니 문절(文節)이다. 학근호문왈문(學勤好文曰文) 즉 ‘부지런히 배우고 글을 좋아함은 곧 문이요’ 호렴자극왈절(好廉自克曰節) 즉 ‘청렴을 지키고 자기를 이김은 곧 절이다.’라는 뜻이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평온하며 가산을 따로 모으지도 아니하였으며, 남에게 청탁하는 일도 없었으며, 출세를 위해 권력자에 아부하거나 부탁도 하지 아니하였으며, 항시 공정하고, 정직하여, 오랫동안 공직에 있었으나 언제나 시작과 끝을 깊이생각하며 매사를 신중히 처리하였다고 한다. 본인의 집은 역시 비바람을 가릴 뿐이었고, 독에는 쌓인 양식도 없었다고 한다. 벼슬이 높아져 녹봉이 많아지면 그 늘어난 녹봉만큼 빈곤한 사람을 더 도와주니 그때 기다려 시집 장가가는 친족들도 있었다고 한다.
슬하에 9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따라 종4품 이상의 대부(大夫)가 5명, 종6품 이상 참상(參上)이 2명, 종 7품 이하 참하(參下)가 2명이었다고 한다.
1530년(중종 25) 대구의 유림들이 공을 기리는 사우(祠宇)를 세우기 위해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 지역을 빛내고 공직자로서 국가에 기여한 공적을 여러 사람의 본보기로 하고자 청백서원(淸白書院)을 세워 그를 기렸다. 또한 세조 당시 공신들의 진영을 그리도록 했는데 공의 진영(眞影) 2점이 현재에도 전해온다. 한 점은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있는 화담사(花潭祠, 광주시기념물 제118호)있고 다른 한 점은 충북 청원군 옥산면(충북 기념물 제159호)에 있다. 화담사의 영정은 1735년(영조 11)보성군수를 역임한 정화가 아버지 문절공의 영정을 모시고 있었는데 양호(兩湖) 즉 호서와 호남의 선비들이 발의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청백서원은 빈터만 남아 있고, 공의 영정 또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복사(複寫)를 해서라도 이 곳 새로 조성한 묘역 내 청백재에 걸어두어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게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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