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용수동 용수천 가에 있는 숭정처사 대암 최동집의 유허비 비문은 영`정조 명재상 채제공이 썼다.
용연서당, 대암 최동집은 명이 망하자 숭정처사로 자임하며 이곳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후손 최병찬님이 쓴 용연서당 현판
팔공산 남록의 용수동 일대는 골짜기가 깊고 수량이 풍부해 경작지는 좁지만 물 걱정하지 아니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 큰 가뭄에도 끼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축복받는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地理的)인 이점을 간파했던 분이 대암(臺巖) 최동집(崔東집, 1586~1661)선생이었다. 그는 1591년(선조 24) 무과에 합격하고 임란 시 초유사 김성일(1538~1593)에 의해 의병가장으로 임명되어 전쟁을 수행하는데 따른 기초 지식도 없는 농민 등 향병(鄕兵)을 잘 조련하여 전공을 세웠던 최계(崔誡, 1567~1622)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이름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금방 모를 분이 많겠지만 대구의 전형적인 반촌 “옻골마을(대구시 민속자료 제1호)”를 맨 처음 개척한 분이라면 쉽게 이해되리라 믿는다.
용수동은 필자가 팔공산공원관리사무소에 근무하던 20여 년 전만 해도 초가가 듬성듬성한 한적한 농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별장이며 전원주택이 즐비하여 휴양지화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토지이용을 제한하고 있어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점이다.
동화지구에서 요식업으로 성공하여 이제는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몇 년 전부터 팔공산 일대의 자랑거리를 찾아 주민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는 김태락님과 함께 일대를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달구벌얼찾는모임’에서 주관했던 팔공산 정상 제천단 부근에 설치 할 표석과 고유제의 제물(祭物)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공산지역민 중에서 한국동란과 월남전에 참전한 사람들을 현창하기 위하여 기념비세우는 일을 주도했다.
우선 용수천 가에 있는 숭정처사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를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팔공산을 좋아해 이리저리 다니면서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을 뿐, 따지고 보면 뜨내기일 수밖에 없는 나에 비해 한평생을 이곳에 발을 디디고 살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유적이 있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숭정처사란 조선의 선비들이 그토록 사대(事大)하든 명나라가 오랑캐로 불리던 청나라에게 망하자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은둔해버린 선비를 일컫는 말로 전국적으로는 몇 분이 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대암 선생이 유일한 분이 아닌가 한다.
비의 뒷면에는 영·정조 시대의 명재상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찬한 비문이 있다.
“팔공산이 영남에 이름이 드러나서 초목과 구름, 연기가 혁혁하게 특이한 기운이 있는 것은 어찌 은일(隱逸)하는 군자가 일찍이 그 산속에 은둔한 까닭이 아니겠는가. 그 군자가 누구인가? 사부(師傅)공 이분이다.
공의 휘는 동집(東집)이요, 자는 진중(鎭仲)이며 대암(臺巖)은 그의 호이다. 일찍이 한강 정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여 학문하는 요결을 들을 수 있었으며, 물러나서는 한 시대의 여러 명유들과 더불어 도의로 교분을 맺어서 성인의 글이 아니면 그와 더불어 강마(講磨, 학문을 갈고 닦음)하지 않았으니 그가 자신에 위한 학문에 힘씀과 공부를 함에 있어서 세밀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이 왕위에 있을 때에 성균 생원으로서 성균관에 유학할 때 적신(賊臣)인 이이첨(李爾瞻, 대북파의 영수로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배시키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사람으로 인조반정 시 참형 당함)이 더불어 교유하자고 요청했으나 드디어 소매를 뿌리치고 큰 재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분수에 만족하는 듯이 생활을 즐기며 배고픔을 잊고 살았다. 인조 17년(1639)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능참봉에 제수되었고 다음해에 효종대왕이 대군으로 있을 때 청나라의 심양에 인질이 되어 갈 당시 공에게 대군사부(大君師傅) 벼슬을 배명했는데 공이 그 명을 듣고 말을 달려 조정에 나아갔으나 대군의 행차와 길이 매우 멀어 미치지 못하여 체임되니 통곡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신년(인조 22년, 1644) 명나라가 망하니 드디어 팔공산으로 들어가서 농연(聾淵)의 수석이 좋은 곳에 초가를 짓고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이하생략.” 이상이 전반부의 내용이다.
번암(樊菴, 채제공의 호)은 대암의 행위는 ‘제나라의 노중련이라는 사람이 진(秦)나라의 방자한 정치에 반대하여 동해에서 죽을지라도 진나라 벼슬을 안 하겠다며 배를 타고 떠난 후에 소식이 없었다는 고사와 같다.’고 했다.
특히, 대암은 연경서원에 퇴계를 모시는데 주력하였을 뿐 아니라, 문학가로서도 남다른 자질이 있어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러나 친구가 빌려가서 화재로 소실되고 일부만 남은 것을 그 후손들이 대암집을 만들어 수록했다. 그 중에서 두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상(泗上)에서 읊다’에서
가슴속에 돋아난 띠는 제거하기 쉽지 않느니/ 스승을 따르던 처음 뜻이 도리어 소홀할까 두렵도다./학업이 꾸준하지 못하면 마침내 유익함이 무엇인가./ 집을 이곳으로 옮겨 살지 못한 것이 한(恨)되는 구나.
하여 학문에 대한 그의 게으름을 꾸짖고, 스승 한강 정구(鄭逑, 1563~1620)가 살고 있던 사상 즉 오늘 날 북구 사수동으로 이사하지 못한 것을 한탄 하였으며 또한 ‘계사(溪榭, 시냇가에 정자)’에서는
산중에 들어와서 새로 집을 지은 것은 바로 속세의 티끌을 멀리하기 위함이라/아침과 저녁에 수석(水石)에 나아가고 여름과 봄을 잎과 꽃으로 기억하네./ 무슨 마음으로 이 세상을 놀겠는가?/ 도리어 귀먹은 사람 되기를 원하네./책상에 가득한 선현의 말씀에는 다만 의(義)와 인(仁)구함이로다.
라고 해서 첩첩산중인 이곳의 생활에 만족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지은 호 대암은 옻골마을의 주산인 대암산에 돈대(墩臺)처럼 우뚝한 바위를 말한다. 그가 후학을 가르쳤던 서당 이름 농연(聾淵)은 이 시에 나오는 귀머거리라는 뜻이다. 선대 최치원 선생이 자기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가야산에 들어가 소요하던 정자를 농산정(聾山亭)이라 했듯이 그 역시 용수동에 은거하며 바깥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먹은 못이라고 농연(聾淵)이라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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