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인물

도전에 목마른 유목민

이정웅 2009. 2. 2. 20:51

홍콩 과학기술대학 김성훈 교수
 
 
 
홍콩과학기술대 컴퓨터공학과 김성훈 교수(왼쪽)가 무니르 함디 학과장과 연구 과제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지석기자
홍콩 과학기술대학 컴퓨터공학과의 김성훈(37) 교수는 자신이 '유목민' 같다고 표현했다. 지난달 14일 홍콩에서 만난 김 교수는 지난달 초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미국의 '베이스 캠프'에서 철수해 대부분의 짐들을 현지에서 처분하고 부인과 함께 홍콩에 안착했다. 홍콩으로 온 지 열흘 남짓밖에 되지 않아 학교 측이 제공하는 아파트에는 가구들만 있어 썰렁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김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왜 자신을 '유목민' 같다고 하는지, 왜 그 같은 삶에 만족하며 앞으로도 '유목민' 같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실업계인 구미전자공고를 졸업한 뒤 대구대 전자공학과에서 공부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4형제 중 차남이어서 실업계 고교를 다녀야 했지만 공부를 하려는 강한 욕구는 그를 대학생으로 만들었다.

그는 졸업을 앞둔 1995년 당시 대학 4학년 때 '까치네'라는 인터넷 검색엔진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여러 업체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았고 당시 데이콤으로부터는 검색엔진 특허를 거액에 사면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대신 그는 기술개발 분야를 맡기로 하고 다른 2명의 사업가와 함께 (주)나라비전을 공동 창업했다. 나라비전은 '깨비'라는 이름의 웹 서비스 사업에 나섰으며 이메일 웹 패키지 사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당시 일부 포털업체들이 기술력보다는 광고 마케팅에 의존해 성장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 원천기술 개발에 더 주력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판단되자 그는 부인 곽연경(35)씨와 결혼한 뒤 2000년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컴퓨터공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소프트웨어 버그'와 관련된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2006년 9월 박사과정을 마칠 무렵 미국 실리콘 밸리의 야후 등 잘나가는 업체들이 그에게 스카우트의 손길을 뻗쳤다. 많은 연봉과 안락한 삶이 눈 앞에 어른거렸지만 그는 공부와 연구를 더 하고 싶어 취직할 경우 받게 될 급여의 3분의 1 수준만 받기로 하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다시 도전을 해야 하나 싶어 망설이기도 했지만 MIT에 가기로 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세계적 석학들의 연구과정에 참여하면서 공부도 많이 하고 저 자신도 많이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요."

연구원으로 일한 지 8개월째인 2007년 5월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버그'에 관한 박사과정 제출 논문이 2006년 베스트 논문으로 선정됐다는 전갈을 받게 됐다. 자신감을 얻게 된 그는 연구원 생활을 계속하는 한편 연구원 이후의 삶을 위해 지난해 초부터 세계 각지의 대학에 교수직을 신청했으며 여러 군데에서 서류 심사에 합격한 후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홍콩과학기술대를 선택했다. 그는 홍콩과학기술대가 초빙교수를 위해 제공하는 연봉, 각종 지원조건 등이 맘에 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학기당 1, 2과목으로 수업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연구에 전념토록 한 대목에 이끌려 홍콩행을 결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홍콩의 구룡반도에 위치한 홍콩과학기술대는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공계 분야의 뛰어난 학술연구로 국제 학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학이다. 지난해 10월 영국의 더 타임스가 발표한 국제 대학 평가에서 홍콩과학기술대는 종합 순위 39위를 차지했고 IT공학 분야에서는 24위를 차지했다. 이 평가에서 서울대가 국내 대학으로는 가장 높은 종합 순위 51위에 올랐다. 홍콩과학기술대의 도약이 두드러지자 국내의 포항공과대학과 카이스트가 이 학교를 방문, 학교의 연구 시스템 등을 벤치마킹해 가기도 했다.

홍콩과학기술대는 1991년 홍콩 정부에 의해 설립, 짧은 기간 안에 세계 정상급의 대학으로 발돋움했다. 이 학교가 급성장한 데에는 안정적인 재정을 내세워 세계적으로 우수한 교수진을 좋은 조건으로 초빙, 뛰어난 연구실적을 쌓은 것이 바탕이 됐다.

학교 측은 부동산 가격이 비싸기로 유명한 홍콩에서 학교 인근에 쾌적하고 넓은 아파트를 제공하고 자녀 교육을 지원하는 등 교수들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 환경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 학교에 재직 중인 한국인 김장교 교수(기계과·공대 부학장)와 튀니지 출신의 무니르 함디 컴퓨터공학과 학과장은 "연구에 몰두해 뛰어난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면서 홍콩과학기술대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됐다"며 "우수한 교수들이 많지만 재임용 기준이 까다로워 탈락하는 교수가 많을 정도로 연구 논문 실적을 강조하는 것이 이 학교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김성훈 교수 역시 이 같은 학교 분위기에 힘입어 연구 의욕이 치솟고 있다. "우수한 한국 학자들이 많지만 컴퓨터 소프트웨어 연구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며 "앞으로 제자들과 함께 연구에 파묻혀 소프트웨어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먼 훗날 어느 순간에 새로운 도전 목표가 나타나면 홍콩의 '베이스 캠프'에서 철수할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남겼다.

김지석기자 jise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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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02월 0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