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 영덕 입향조 이애가 조선 조 성종 때 지은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8호)
우리나라에서 도토리 죽으로 가장 유명한 집안이 바로 영덕군 영해에서 살았던 재령 이씨(載寧 李氏) 집안이다. 지난번 칼럼에 나간 영양군 석보에 있는 400년 된 참나무 이야기를 읽고 소설가 정동주(61) 선생이 이 집안 도토리 죽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같은 시대에 더 써야 한다!'고 필자를 압박(?)했다. 그러면서 영해의 재령 이씨들이 1년 동안 수확한 도토리의 양이 자그마치 200가마 분량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한두 가마도 아니고 어떻게 도토리를 200가마씩이나 수확을 했단 말인가!
이씨들은 당시 '마당 6000석'을 하던 부자였다.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던 창고의 쌀은 제외하고 추수가 되면 본가의 마당에 쌓인 쌀이 6000석이었다는 의미이다. 영남에서 5위 안에 들던 부잣집이었던 이 집에서는 흉년이 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도토리 죽을 끓여 주었다. 배고픈 이웃을 돕는 것이 양반이 해야 할 처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뒤의 경상도는 경제가 망가진 데다 흉년이 자주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지면 그 다음에는 도토리를 먹어야 했기 때문에 이 집안에서는 하인 수백 명을 시켜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 모으도록 하였다. 그 분량이 1년에 200가마였다.
영해의 재령 이씨 운악종가(雲嶽宗家)의 안주인인 진성 이씨 부인과 그 셋째 며느리인 장 부인(張桂香)이 중심이 되어 대문 밖의 은행나무 밑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하루에 평균 300명분의 도토리 죽을 쑤었다고 한다. 이 죽을 먹으려고 경북 북부 일대의 기민(饑民)들이 몰려들었다. '이씨 집에 가면 죽을 준다'는 소문이 일대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하루에 700명분의 죽을 끓여야 할 정도였다. 도토리를 만지다가 고부간에 손톱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죽을 끓였다.
영양군 석보로 분가를 한 석계 이시명과 장 부인은 이사오자마자 도토리나무부터 심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도토리 죽을 끓여 댔고, 선대의 그 공덕으로 재령 이씨 후손들이 요즘 사회 각 분야에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입력 : 2009.01.18 22:11 / 수정 : 2009.01.20 09:55
참나무
나무 이름 100가지와 꽃 이름 100가지를 아는 사람은 잘사는 인생이다. 군자는 산을 가까이해야 본성을 지킬 수 있으며, 산에 가면 대화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산에 가면 나무 이름과 꽃 이름을 알아야만 대화가 잘 된다. 나무와 꽃의 이름을 모르면 익명의 관계로 남지만, 이름을 알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시골의 황토집에서 아궁이에 군불을 때다 보니까, 참나무의 성질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장작불 때기에 가장 좋은 나무는 참나무이다. 소나무 장작에 비해서 2배는 오래 탄다. 참나무 장작 3~4개만 아궁이에 넣어 놓으면 방구들이 뜨뜻해지므로, 참나무는 참 좋은 나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기도 적다. 소나무는 송진이 있으므로 연기가 맵지만, 참나무는 연기가 적고, 나무에서 타는 냄새 자체도 맑다는 느낌이 든다. 참나무 타는 냄새를 맡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된다. 욕심도 줄어들면서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생긴다. 일종의 '아로마테라피'라고나 할까. 그래서 옛날부터 참나무 숯을 최고로 쳤다.
삼국통일을 한 후에 전성기를 맞았던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수많은 기와집이 있었고, 그 기와집에서 밥을 하거나 난방을 할 때 사용하던 연료는 참나무 숯이었다고 전해진다. 경주시내 수만 채의 주택에서 끼니때마다 소나무나 아니면 기타 나무로 불을 때게 되면 그 연기가 경주 하늘을 뒤덮게 되므로 연기가 덜 나는 참나무 숯으로만 밥을 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 참나무가 앞으로 소나무를 제치고 한국의 대표 나무가 될 거라는 산림과학원의 분석이 나왔다. 온난화가 되어 온도가 3~4도 올라가면 소나무가 줄어들고 더위에 강한 '졸참나무'가 번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졸참나무는 참나뭇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와 더불어 보통 참나무라고 부른다. 참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는 흉년에 사람들이 먹던 구황식품이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은 재령 이씨들의 동네이다. 이 동네에는 갈암 이현일의 어머니인 장 부인이 흉년에 대비하여 특별히 심어 놓았다고 전해지는 약 400년 된 참나무가 수십 그루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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