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민의 휴식처이자 희로애락을 함께 해오고 있는 명산 비슬산(琵瑟山, 1084) 정상 일대는 계속되는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여러 모양의 암석이 드러나 있다. 돌출된 부분 또한 많아 비슷비슷한 높이를 하고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정상의 모습이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주봉(主峰)의 명칭을 두고 지역에서 오래 동안 활동해오던 향토사학자들과 몇 분의 시인 등 비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자는 정상 즉 주봉을 ‘대견봉(大見峯)’이라고 하여 이미 표석을 설치해 놓은데 반해, 후자는 그 자리가 아닌 만큼 옮기고 새로 천왕봉(天王峯)이라고 쓴 표석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 한다.
비슬산 정상 일대, 좌측 바위에 대견봉이라는 표석을 설치했다.
필자 역시 대구의 정체성 찾기에 노력해 오고 있고, 자생지의 남방한계선이 덕유산이라는 솔나리(환경부지정 멸종위기 2급 식물, 현재는 밀양 등지에서도 발견됨)를 발견, 산림과학원에 통보하여 바로잡도록 한 일이 있으며, 달성군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을 때 진달래 군락지 보존사업을 펼쳐 나중에 ‘참꽃축제’로 발전하도록 하여 군민소득증대에 기여한바 있으며, 조성 중이던 휴양림이 예산부족으로 애로를 겪을 때, 시비(市費)를 지원하도록 하여 무사히 개장하게 하는 등 이런 저런 인연으로 이 다툼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삼국유사>의 저자인 국사 일연(一然, 1206~1289)스님이 30여 년 동안 머물며 득도한 산이자, 붓꽃, 노랑제비꽃, 꽃쥐손이, 산부추, 물매화 산자약, 은방울꽃 등 아름다운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며, 신선(神仙)바위이야기 등 많은 전설이 깃든 자랑스러운 산이게 더욱 그런 심정이다. 비슬산의 이름이 맨 처음 등장한 사료는 <삼국유사>다. ‘포산이성(包山二聖)’ 즉 ‘포산의 두 성사’ 이야기에서 쌀 포(包), 뫼 산(山)을 써서 포산(包山)이라 하였고, 주민들은 ‘소슬산(所瑟山)이라고 부르는데 범어(梵語) 즉 산스크리트어로는 포(包)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왜 주민들이 소슬산이라고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없다. 필자의 생각은 현풍평야에 높게 ‘솟은 산’이라는 뜻인데 우리 고유의 지명이 한자화 될 때 비슷한 음의 ‘소슬산’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한다.
별칭, 포산(包山) 역시 정상을 나무들이 포(苞) 즉 턱잎처럼 싸고 있어 불린 것 같다. 소슬(所瑟)이나 포(苞), 모두 산의 생김새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보여 진다.
이후 <경상도지리지>에는 도울 비(毗)자를 써서 비슬산(毗瑟山)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비파 비(琵)의 오기로 생각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시 비파 비(琵), 거문고 슬(瑟)자를 써서 비슬산(琵瑟山)이라하고, 다른 이름으로는 쌀 포(包)자 위에 풀초를 더해 포산(苞山)이라고 했으나 같은 음이기에 같은 뜻으로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비슬산의 이름은 (솟은 산)-소슬산-포산-비슬산으로 변화를 거친 것 같다.
현풍평야에서 바라본 비슬산
현풍의 건치연혁, 성씨, 등을 정리해 놓았으며, 1844년(헌종 10)에 간행된 현풍읍지를 보면 비슬산에는 조화봉(照華峯, 남쪽), 대견봉(大見峯, 最高頂), 천왕봉(天王峯, 與大見峯, 雙峰) 등 모두 3개의 봉우리가 등장하고, 1867년(고종 4)~1873년(고종 10)간에 간행된 교남지에는 이들 3개 봉우리 이외에 필봉(筆峰, 남쪽), 수도봉(修道峯, 북쪽), 월선봉(月先峯, 남쪽) 등 모두 6개의 봉우리가 등장한다.
1844년(헌종 10)에 간행된 현풍읍지(부분)
이들 6개의 봉우리 중에서 ‘당나라 스님 일행들이 이 곳에 이르러 중국에서도 비춰 조화봉(照華峯)이라 한다는 전설이 있으며, 남록에 있다.’고 한 조화봉과 역시 남쪽에 있다는 필봉, 월선봉에 대해서는 위치를 밝혀 놓았기 때문에 다툼의 여지가 없다. 또한 수도봉은 북쪽에 있다고 했지만 차후 그 위치를 밝혀도 되기 때문에 이번 다툼에서는 논외(論外)로 하고 당장 문제가 되고 있는 대견봉과 천왕봉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어느 측의 주장이 옳은지 빠른 시일 내 밝혀야 후속 조치들이 가능하고, 달성군 또한 공부(公簿)를 정리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견봉이 주봉이라고 주장하는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현풍읍지>나 <교남지>의 기록에 ‘대견봉 최고정 (大見峯 最高頂)’ 즉 ‘대견봉이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자구(字句)를 그대로 받아드려 이미 표석까지 설치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측은 ‘유가사 사적기에 주봉을 천왕봉이라 했으므로 <현풍읍지>의 그림지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가 천왕봉(天王峯)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양측 주장을 살펴보면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은 <현풍읍지>나 <교남지>의 기록 중에서 대견봉을 설명해 놓은 부기(附記)만 받아들였고, 시인 등은 유가사사적기와 <현풍읍지>의 그림지도에 의존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혼란이 초래된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천왕봉을 설명해 놓은 부기(附記) 중에서 “여(與)대견봉, 쌍봉(雙峰)”에 대한 기록을 외면한 오류를 범했다. 이 잘 못 때문에 논쟁이 발생한 것 같다.
현풍읍지의 그림지도,
공교롭게도 그림지도의 상단부에는 유가사가 그려진 쪽에 하나, 김천사가 그려진 쪽에 하나, 비슷한 높이의 두개의 봉우리가 그려져 있다. 따라서 시인 등은 유가사의 사적기의 기록에 따라 왼쪽이 천왕봉이고, 오른 쪽 김천사가 있는 곳의 봉우리 즉 오늘날 대견사지가 있는 곳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대견봉이라고 한다.
아울러 산봉우리의 명칭이 어떻게 부쳐졌는지에 대한 검토도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산 이름이나 봉우리 이름은 토속신앙과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전래되기 전 우리민족의 주 신앙 대상은 서낭신이거나 산신(山神)이었다. 이 때 가장 높은 산신은 천왕(天王)이거나 천황(天皇)이었다. 따라서 주봉을 천왕봉이나 천황봉으로 불렀다. 지리산의 천왕봉이나, 속리산의 천황봉은 이때 부쳐진 이름이다. 그 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많은 산 이름이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주로 비로봉으로 불렀다. 팔공산, 금강산, 소백산의 비로봉은 이런 연유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다. 또한 비로(毘盧)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을 뜻하듯이 대견(大見)은 문수보살의 친견을 뜻한다고 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양측이 외면했던 천왕봉의 부기(附記)에 대한 해석을 해보자. 읍지에서 ‘천왕봉 여(與)대견봉 쌍봉’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천왕봉은 대견봉과 함께 쌍봉을 이루고 있다.’라는 것이다. 또한 쌍봉은 ‘나란히 솟은 두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따라서 이들 문장을 종합해 정의를 내리면 “비슬산의 최고 높은 봉우리는 대견봉이고, 천왕봉은 대견봉하고 나란히 쌍봉을 이루고 있다.” 이다. 이는 <현풍읍지>의 기록 그대로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종전에는 천왕봉이라 했었는데 불교전래 이후 대견봉으로 바뀐 것을 지도를 그린 사람들이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천왕봉이라 하여 표석을 세우려면 방법은 간단하다. 즉 대견봉의 표석은 그대로 두고, 대견봉과 나란히 쌍봉을 이루고 있는 천왕봉에 표석을 하나 더 세우면 된다. 이 견해는 실제상황과도 일치한다. 현재 대견봉이라고 표석을 설한 곳에서 북쪽으로 20여 미터 지점에 또 다른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것이 천왕봉일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도 아니면 동`서 어느 쪽에서 보아 대견봉과 쌍봉을 이루는 곳을 찾아 천왕봉이라는 표석을 하나 더 세우면 된다.
지금까지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정상은 두개의 봉우리 즉 쌍봉이기 때문에 그 중 하나인 대견봉이 주봉이라며 표석을 설치한 지역향토사학자들의 주장도 맞고, 다른 하나인 천왕봉이 주봉이라는 시인 등 비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옳다. 이처럼 문헌만 자세히 살펴보았으면 될 간단한 문제를 두고 왜 논쟁이 벌어졌는지 아쉽다.
북쪽 8부 능선에서 바라본 비슬산 정상 두 봉우리 즉 쌍봉 오른 쪽 봉우리에 대견봉이라는 표석이 있으니 왼쪽 봉우리애 천왕봉이라는표석을 설치하면 된다.
사실 오랜 세월 전에 있었던 일을 두고 글자 한, 두자 해석으로 재단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안에 대해 확실한 물증이 없고 문헌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에 의존하는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본다.
필자 역시 이번 일을 통해 비슬산을 다시 살펴보는 기회가 되었으며, 그 결과 양측이 다 만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자료를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사를 하다보니 최근에 펴낸 <달성군지, 1992>와 시중에 나도는 많은 등산지도에도 최고봉은 대견봉이었다. 만약의 사실상 그렇지도 않지만 다시 천왕봉으로 바꾼다면 이 많은 자료들을 모두 변경해야하는 엄청난 부작용이 따를 것이다. 또 하나 이 일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일연스님이 수도했다는 보당암(寶幢庵), 무주암(無柱庵), 묘문암(妙門庵)의 유구를 찾는 일이고, 다음은 스님이 오랜 기간 주석했다는 인흥사를 복원하는 일이라고 본다. 이런 일들이 산적한데도 언제까지 봉우리 명칭에만 매달려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양측이 이 결론에 동의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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