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청도김씨의 충절을 상징하는 낙화담 소나무

이정웅 2009. 3. 3. 12:06

 

 경상북도 기념물 제 147호, 일설에는 임란 시 마을의 부녀자들이 왜군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뛰어든 후 섬이 생기며 저절로 자랐다고도 하고 또 다른 설에는 김구정 선생이 고려 말 이 곳에 들어와 못을 팔 때 심었다고도 한다.

 임란 시 의병장 김준신을 기리는 비각 경상북도 기념물 113호

  노산 이은상이 짓고 일초 김현승이 글을 쓴 낙화담의적찬양시비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과 하동면에는 각기 특별한 의미를 간직한 노송(老松)이 한 그루씩이 자란다. 화서면에는 크기나, 자태 등이 어느 지역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아름다운 반송(천연기념물 제293호)이 있는가 하면, 근접한 화서면에는 불사이군 정신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와 임란 시 창의한 의사의 충절이 깃든 역시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147호)가 있기 때문이다.

반송(盤松)을 먼저 보고 지도를 따라 판곡리로 향했다. 그러나 늘 아쉬웠으나 실행되지 아니하여 이제는 말하기조차도 싫은 반듯한 안내 표지판은 이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명색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에 대해 안내표지판 하나 없어 동행한 예(芮)선생이 한 촌부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쳐 낯선 길을 한참 헤매야 했었다. 우리가 찾은  화동면 판곡리(板谷里)는 여말(麗末) 충청도 황간 현감을 하던 청도 김문의 김구정(金九鼎)선생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기 위해 터를 잡은 곳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생의 본관지 청도는 일명 씨 없는 감, 반시(盤枾)와 소싸움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물이 말고 경치가 아름다워 전원주택지로 각광받고 있다.

시조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 1190~1266)선생은 고려 고종 때 문신(文臣)으로 이규보, 김부식, 정지상 등과 함께 고려 8대 시인의 한 분이다. 아직 태학(太學)의 학생이었던 시절 그는 거란 전투에 자원했다. 출전을 앞둔 대부분의 병사들이 방패에 용이나, 호랑이, 도깨비 등을 그려 호신용으로 삼을 때 유독 선생만은 ‘국난신지난(國患臣之患),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친위자소우(親憂子所憂),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이 근심할 바이다. 대친여보국(代親如報國),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효가쌍수(忠孝可雙修), 충과 효를 함께 닦는 것이다.’ 라고 써 붙여 대장 조충(趙冲, 1171~1220)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218년(고종 5)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전주사록, 보문각 교감, 진주목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258년(고종 45)에는 변방을 지키는 책임을 맡아 40여성을 안전하게 지켰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정당문학,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종 2품)를 거쳐 본관지 오산(鰲山, 지금의 청도)군(君)으로 봉해졌다.

뛰어난 시인답게 비슬산의 유가사에 관한 시도 남겨 대구와도 인연을 맺었는데 시문은 다음과 같다.


안개 낀 고요한 맑은 절가에/ 푸른 첩첩산은 가을빛이 짙었구나. /구름사이 절벽은 육칠 리 나 이어졌고 / 하늘 끝 아득히 산봉우리 천만 겹이로다. /다회 끝난 솔 처마에 초생 달이 걸려있고 / 염불마친 평상에 찾아드는 막 종소리 흔들리듯 들려오네. /시냇물도 응당히 벼슬아치 알아보고 웃으리라 마는 /씻을래야 씻지 못할 세속의 자취로다.


이 작품은 그가 72세 때 쓴 시로 현재 유가사(瑜伽寺) 경내 한 곳에 새겨 놓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

판곡리를 개척한 김구정 선생은 이 분의 9세 손이자, 청도 김씨가 곶감, 쌀, 누에고치로 이름 난 삼백(三白)의 고장 상주에 뿌리를 내린 1세대가 된다. 마을 뒤 쪽은 산이 감싸 찬바람을 막아주고, 앞은 훤히 트여 양지바르며, 들은 크지 않지만 땅이 기름져 수십 가구가 먹고살기에는 충분한 듯 했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밝았던 선생의 눈은 달랐다. 멀리 보이는 백화산의 뾰족한 봉우리가 화기(火氣)를 머금고 있어 아무리 단단한 금(金)이라도 녹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김(金)씨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복(發福)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시도했던 작업이 물을 가두는 일이었다. 그는 마을 한 복판에 커다란 못을 팠다. 제아무리 강한 불꽃이라도 이 정도의 물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가 출사를 거부했던 조선왕조도 망했고, 일제강점기를 지나, 오늘 날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의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후손들이 오순도순 정답게 살고 있다.

못 옆에는 단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건물 첨모재와 비각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비각 안의 제단비(祭壇碑,경상북도 기념물 제113호 )는 임진왜란 때 창의한 선생의 후손 절곡(節谷) 김준신(金俊臣, 1560~1592)의사를 기리기 위해 1850년(철종 1)에 세워진 것이다. 그는 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당시 상주목사 김해를 찾아가 방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유언비어로 세상을 어지럽힌다 하여 감옥에 갇혀야했다. 그의 예언이 적중하여 왜군이 쳐들어오자 다급해진 목사는 기병 백여 명을 내주면서 먼저 출전케 하고 자신은 나중에 뒤따르겠다고 했으나 남쪽에서 도망쳐오는 난민들을 왜적으로 오인한 그는 발길을 뒤돌리고 말았다. 칠곡 석전에 이르러 원군을 기다리든 그로서는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체할 수 없는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대구 인근까지 진출했다. 이 때 왜군은 이미 대구를 함락하고 금호강을 건너 북상하는 중이 있었다. 그는 황급히 상주 본진으로 되돌아와 북천전투에 참가 수백 명의 왜적의 목을 베고 장렬히 순직했다. 그의 용맹으로 타격을 크게 입었던 왜군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40여리 떨어진 판곡리까지 쳐들어와 그의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 때 부녀자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입향조가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파 놓았던 못에 투신하니 낙화담(落花潭)이라는 못 이름은 이런 이유로 부쳐졌다. 훗날 유림의 발의로 그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정조(正祖)가 의사(義士)로 불렀고, 1820년(순조 20, 문중자료에는 순조 19년)에는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종3품)가 추증되었다.

현재 낙화담 입구에는 노산 이은상이 짓고 일초 김현승이 쓴 시비가 있어 분위기를 더욱 고즈넉하게 한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 / 절토곡 피 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 / 설악 높은 봉이 본대로 이르는 말 / 꽃은 떨어져도 열매를 맺었다고 /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낙화담 속 작은 동산에는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부녀자들이 뛰어든 후 섬이 생기고 나무가 자랐다고도 하고, 못을 만들 당시 심은 것이라고도 하는 것 같다. 그 사연이야 어떻던 불사이군의 정신과 나라를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바친 넋이 깃들어 오늘도 푸름을 유지하며 청도 김문의 충절을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