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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질한듯 곱게 드리운…엉킴없는 곡선 곡선의 여유…봄이다
부패의 고리가 드렁칡이다. 얽히고설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철면피들. 역사에 슬픔만 더 할뿐. 다급한 서민의 하루에는 전혀 이득이 없다. 늘어놓는 변명들은 너무 구차스럽다. 가똑똑이들. 사과는 한다면서 해명은 뭐고 방어는 또 뭔가. 몰랐던 일은 몰랐다고 말하기로 하다니. 그러면 모르는 일이 되는 것일까. 눈 딱 감고 아웅. 500만달러, 100만달러. 달러가 무슨 남의 집 개 이름인가. 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이다. 그렇다고 따스한 봄날이 혹독한 겨울로 뒷걸음치지는 않을 터. 그들은 그들이고 봄은 봄이다. 대구 신천을 끼고 달리는 동로. 그 동로의 성북교와 경대교 사이. 10여 년 전 심은 수양버들 몇 그루가 부지런히 잎을 키우고 있었다. 물씬 물씬 하늘거려도 그들은 용케도 엉키지 않는다. 아무리 가지가 많아도 엉킴이 없다. 바람이 흐드러진 가지들을 여유롭게 흔든다. 엉키고 설켜 가지가 혼란스러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결코 엉킴이 없는 수양버들. 그럴 때 봄바람이 조금 더 일면 그 줄기들은 나부끼며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하느적 거리며. 그럴 때 내 보이는 여유, 그 여유. 곡선의 여유! 물론 세찬 바람이 몰아쳐도 수양버들은 결코 엉클어지지 않는다. 그럴수록 빗질하듯 곱게 드리운 그 줄기들이 오히려 가지런하다. 전혀 뒤섞여 엉망으로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저절로 이뤄지는 가지런함. 큰 물결에 이끌려 가는 지혜로운 나무답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영원히 얻지 못하는, 그러면서 열심히 줄기차게 추구해 온 중용의 도라면 조금 지나친가. 아니지. 수양버들인들 말을 못할 뿐 속이야 웬만하랴. 역경에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보인다. 지나치게 높이 올라간 용은 뉘우치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제 분수에 넘치게 존귀를 극하게 되면 실패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아래로만 처지는 세류(細柳)의 그 수양(垂楊)도 어찌 용이 되어 하늘로 흐느적거리고 싶지 않으리. 수양버들은 실은 중국이 원산지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 선조들도 그 수양의 끈질긴 생명력에 호감을 가졌다. 조선 4대문장가 중 한 사람인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있고(月倒千虧餘本質), 버들은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柳經百別又新枝)"며 찬사의 시를 남겼다. 그만큼 친숙한 수양버들. 왕건이 버들낭자 장화왕후와의 사이에 로맨스가 담긴 나주 완사천(浣紗泉). 수양버들 잎을 띄워 갈증을 풀어준 역사적인 이야기로 지금 수양버들 단장이 한창이다. 그 밖에 수양에 얽힌 이야기들은 우리들 주변에 흔히 전해져 온다. 그래서 예부터 우리 것인 능수버들과 함께 크게 구별 짓지 않고 심으며 즐겼다. 그러나 지금 능수버들은 찾기가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유명한 천안 삼거리의 능수버들도 지금 얼마나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우포 늪에 큰 능수버들이 있다고 일러 준 계명대 김종원 교수는 "봄 날 여린 가지가 적갈색을 띠면 수양이고, 황녹색이면 능수"라고 그 차이를 설명해 준다.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잎자루가 수양은 5㎜이상, 길면 1㎝까지 길지만 능수는 길어야 4㎜이하라는 것. 둘 다 아래로 처지며 형성하는 곡선미는 더 없이 아름답다. 김 교수는 그런 아름다움이 우리 것인 왕버들에도 충분히 지녔다고 한다. 왕버들. 듣기만 해도 우람차다. 그래서 김 교수는 "왕버들은 영남의 선비정신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고 했는데 도산서원에 왕버들 노거수가 있다는 것. 그것보다는 성주의 성밖숲 나무가 대부분 왕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여기서 매우 흥분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은 해 놓았지만 숲은 점차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 왜냐면 오래된 나무들은 아무렇게나 도려내버리고, 솜털이 날린다며 암그루를 베 내 지난 10년간 숲의 절반이 망가져 버렸다고 한탄했다. "왕버들 숲은 안내문대로 심은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 것이며 선조들이 이를 잘 가꿔 우선 낙동강의 홍수를 조절하도록 했다"는 김 교수는 "선조들의 지혜를 후손들이 망가뜨리는 행태가 부끄럽다"고 했다. 이 모두가 우선 아름답게 꾸미는데 혈안이다 보니 생겨난 무지의 탓이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이런 탈은 없다. 몇 년 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버드나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란 영화. 마지드 마지디 감독.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았던 요셉이 극적으로 눈을 뜨면서 세상은 점점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볼 수 없었던 세상과 보이기 시작한 세상의 차이를 요셉을 통해 극대화한 이 영화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메시지를 아주 강렬하게 던진다. 그래. 진정한 행복. 과연 그게 뭘까. 버드나무 길을 걸으면 얻어질까. 박용래의 시다. '버드나무 길'. "맘 천근 시름겨울 때/ 천 근 맘 시름겨울 때/ 마른 논에 고인 물/ 보러 가자./ 고인 물에 얼비치는/ 쑥부쟁이/ 염소 한 마리/ 몇 점의 구름/ 홍안(紅顔)의 소년 같이/ 보러가자./ 함지박 아낙네 지나가고/ 어지러이 떼 까치 우짖는 버드나무 길/ 마른 논에 고인 물." 그의 버드나무 길이 수양이나 능수 혹은 왕버들이 아니고 갯버들이라도 버드나무는 그 상큼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우리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기 충분하다. 물론 수양이나 능수일 땐 말할 것도 없고. 오죽하면 아름다운 여인의 호리호리한 허리를 유요(柳腰)라며 '버들 유'자를 썼을까. 중국의 17세기 문장가 장조(張潮)는 "꽃 같은 얼굴, 새 같은 목소리, 달의 혼, 버들가지 같은 몸매, 가을 호수 같은 맑은 아름다움, 경옥 같은 뼈, 눈 같은 하얀 피부, 시(詩)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미인이라고 했다. 매우 까다롭지만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도 없다. 특히 버들가지 같은 몸매는. 곡선지는 그 아름다운 몸매는 말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관직을 버린 후 귀향하며 버드나무 5그루를 심어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한 도연명의 그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도 수양버들을 이야기 하면서 빼놓을 수는 없다. 아무리 읊어도 읊을수록 그 뜻이 더욱 정연하고 매료되는 시구들. 요즘 세간사에는 다음 구절이 어떨까. "…귀거래혜(歸去來兮 돌아 가자) 청식교이절후(請息交以絶遊 사귐도 어울림도 이제 모두 끊으리라) 세여아이상위(世與我而相違 세상과 나는 서로 어긋나기만 하니) 복가언혜언구(復駕言兮焉求 다시 수레를 몰고 나간들 무엇을 얻겠는가)…" 그렇다. 세상과는 사뭇 어긋났으니 다시 변명한들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 답답한 그대들. 똑똑한 친구들. 그렇다 그런 생각마저도 버려야 한다. 차라리 그냥 저 강변의 그 수양버들 아래서 휘 곡선을 바라보며 이 봄을 맞으면 어떠리. 곡선의 봄을. |
/글=김채한 객원기자 namukch@hanmail.net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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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수양버드나무는 수변경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대구시가 수나무를 삽목해 육성했기 때문에 꽃가루 (사실은 종자를 멀리 날려보내기 위해 붙은 털임)가 날리지 않음
* 이 수양버드나무는 수변경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대구시가 수나무를 삽목해 육성했기 때문에 꽃가루 (사실은 종자를 멀리 날려보내기 위해 붙은 털임)가 날리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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