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다사지역)10곡
성주도씨 대구입향지인 달성군 다사면 서재리에 있는 용호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팽나무 노거수를 보러 갔다가 <용호서원유적지 서제사적편 합>이라는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이를 통해 서원에 배향된 양직당 도성유(1571~1649), 서재 도여유(1574~1640), 지암 도신수(1598~1650)에 대한 생몰년도로부터 지낸 벼슬과 행적, 저서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사항을 알았을 뿐 아니라, 특히 일대의 아름다운 10곳을 노래한 시문을 확보할 수 있어 뜻 밖에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서재를 포함한 강정, 이천, 박곡 등 다사 일대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지금과 같이 제방을 쌓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범람 시 큰 호수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와룡, 마천, 파산이 주위를 감싸 안아 경관 역시 수려해 신라 때부터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운 최치원선생이 이 곳 마천산에 있던 ‘선사암(仙槎菴)’에 머물면서 벼루를 씻던 못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그 후 1601년(선조 34) 낙재 서사원이 공부할 곳으로 이천에 완락당(玩樂堂)을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인동(현 구미시) 출신의 여헌 장현광을 비롯한 도성유 등 지역의 선비들이 뱃놀이를 하며 시회를 열었던 기록과 그 기록을 바탕으로 조형규라는 화가가 1833년(순조 33) 그린 그림<금호선사선유도>가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진사 서호 도석규(都錫珪, 1773~1837)도 ‘서호병 10곡(西湖屛 十曲)’ 즉 서호 십 곡(曲)을 남겼다. 금호강이 호수처럼 펼쳐져 선경을 이루고 이곳이 서재리의 서쪽에 있어 서호(西湖)라 이름 짓고 자호(自號)마저도 서호라 한 것 같다.
서거정선생이 대구 전 지역을 10영으로 노래한 것과 달리 ‘서호 십 곡’은 지역적으로 다사일대로 한정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 금호강 하류 지역의 경승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서호병(西湖屛) 십곡(十曲)
<서호(西湖), 도석규(都錫珪), 1773~1837>
성균관 진사
제1곡 부강정
첫째 구비, 부강정에 강물은 흐르는데 일곡부강강수류(一曲浮江江水流)
윤씨는 이미 가고 이씨가 성하도다. 윤옹기거이옹휴(尹翁己去李翁休)
유유한 인간사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유유인사성금고(悠悠人事成今古)
머리 돌려 백사장의 백구에게 물어볼거나! 회수평사문백구(回首平沙問白鷗)
*부강정 :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 즉 다사읍 죽곡리 700-3 있었던 정자( 오래 전 허물어지고 현재 집터로 변했다. (파란집)
*윤옹기거이옹휴 : 정자주인이 파평 인윤대승에서 전의인 이지화로 바뀐 이야기
제2곡 이락서당
둘째 구비 배가 이락정에 닿으니 이곡선임이락정(二曲船臨伊洛亭)
한강과 낙재를 기리는 단청이 아름답네. 모한미락화단청(慕寒彌樂畵丹靑)
강을 오르내리는 뱃노래 귓전에 울리니 도가황약문래이(棹歌怳若聞來耳)
구문의 뛰어난 선비 만고진리 깨달았도다. 구실군용만고성(九室群聳萬古醒)
*이락서당 : 1799년(정조 23)에 한강과 낙재를 기리기 위해 역내 9문중이 세운 서당
위치: 달서구 파산( 강창교 오른 쪽)
*구문 : 순천 박, 달성 서, 밀양 박, 광주(廣州) 이, 광주(光州) 이, 일직 손, 전의 이, 함안 조, 성주 도, 제씨 문중
강창교 확장공사로 주변 경관이 망가졌으나 서당 자체는 버존 상태가 영호하다.
제3곡 선사(仙槎)
셋째 구비 난가대에 의지하여 묻노니 3곡난가의문지(三曲爛柯椅問之)
고운의 선사 옛 자취를 아는 이 드물구나. 선사유사한능지(仙槎遺事罕能知)
가야산에서 천년동안 소식이 없도다. 가야천재무소식(伽倻千載無消息)
강 위에 뜬 가을 구름은 아득하기만 하네. 강상추운사한시(江上秋雲似漢時)
*선사 : 하빈으로 넘어가는 선사골 입구
-마천산 선사암(仙槎菴)에 최 고운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음 선사(仙槎)는 선사암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됨
제방이 축조되어 깅폭이 좁아졌으나 그나마 경관이 양호하다. 한음 이덕형, 여헌 장현광 등이 읇은 시가 있다.
제4곡 이강서원
넷째 구비 이강서원의 원우가 새롭고 사곡이강원우신(四曲伊江院宇新)
몇 그루 박달 향기 다시 봄을 맞았구나. 수주단향복위춘(數株檀香複爲春)
심의에 대대를 두르고 안빈낙도하였으니 심의대대단표락(深衣大帶簞瓢樂)
우리조상 당시에 진리를 얻었구나. 오조당년견득진(吾祖當年見得眞)
*이강서원 : 낙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
-선사암을 헐고 세웠다고 한다.
-위치 ; 구면사무소와 이천동 사이
*단향(檀香) : 박달나무 향기가 아니라 향나무 향기로 추정 됨
낙재 서사원을 기리는 이강서원 최근에 복원되었다.
제5곡 가지암(可止巖)
다섯 구비 배를 가지암에 대어보니 오곡정선가지암(五曲停船可止巖)
상서로운 짐승들이 노니는구나. 현원백록답삼삼(玄猿白鹿踏三三)
바윗돌은 잇대어 천길 절벽을 이루고 암암유석수천인(岩岩維石垂千仞)
한 줄기 장강의 물에 기강이 배여 있네. 일도장강기상함(一道長江氣像涵)
*가지암 : 세천마을 공동묘지 북편 금호강 쪽의 절벽
-세천지구공단조성공로 일부 원형이 망가졌다.
제6곡 동산(東山)
여섯 구비 동산은 한 폭의 그림 같은데 육곡동산사화도(六曲東山似畵圖)
팔군자가 나시어 용호서원에 봉향하고 팔군자출향용호(八君子出享龍湖)
제악 올려 향사 드린지 오래인데 현가조두요요구(絃歌俎豆寥寥久)
아득한 풍연에 새들도 즐거워라. 호탕풍연조락오(浩湯風煙鳥樂娛)
*동산 : 서재 마을 뒷산 원래는 돼지를 뜻하는 돈(豚)산이었다고 한다.
*팔군자 : 성주도씨 출신 8명의 선비
양직당, 도성유, 서재, 도여유, 취애 도응유, 낙음 도경유, 지암, 도신수, 휘헌, 도신여, 죽헌 도신징, 석천 도이망.
서재리를 안고 있는 산
제7곡 와룡산(臥龍山)
일곱 구비 와룡산을 돌아 나오니 칠지곡출와룡산(七之曲出臥龍山)
황제의 수레가 세 번이나 찾아 왔었구나. 재가삼운고차문(宰駕三云顧此問)
중도에 돌아가시니 제갈량은 통곡했고 중도붕년신량루(中道崩年臣亮淚)
한나라 천운은 거듭되지 않았네. 한가천조불중환(漢家天祚不重還)
*재가삼운고차문 : 유비와 와룡선생 제갈량의 고사를 말함
선사에서 바라 본 와룡산
제8곡 은행정(銀杏亭)
여덟 구비 배가 닿으니 석양이 기울었는데 팔곡선정석일사(八曲船停夕日斜)
은행정이 들판 은행 있는 집에 연이었네. 은정감연야행가(銀亭堪漣野杏家)
소타고 강 건너던 신선 돌아오지 않는데 강상기우선불반(江上騎牛仙不返)
지금껏 사람들 누운 매화나무만 알 뿐이네 지금인독와매화(至今人讀臥梅花)
*은행정 : 마을 동편 나루터에 있던 은행나무 옆 정자
*기우선 : 한강과 낙재가 소를 타고 금호강을 건너 다녔다는 고사
?
제9곡 관어대(觀魚臺)
아홉 구비 강에 닿아 대에 이르지 않았으나 구곡임강부작대(九曲臨江不作臺)
낚싯대 드리운 봄 강물이 거울 같구나. 일호춘수감여개(一蒿春水鑑如開)
사물을 보고도 이치를 깨닫지 못하니 관어불달관어리(觀魚不達觀魚理)
선생 가신 후 찾아온 것이 한스럽구나. 최한선생거후래(最恨先生去後來)
* 관어대 :한강이 소요하던 정자
산 중턱에 관어대 유지가 있다.
십곡 사수빈(泗水濱)
열째 구비 사수가에 배를 대니 십곡유주사수빈(十曲維舟泗水濱)
크고 넓은 우리 유도가 만년토록 새롭구나. 왕양오도만년신(汪洋吾道萬年新)
상린이 활발하여 천기가 기를 정하니 상린활발천기정(翔鱗活潑天機定)
완연히 중앙에 지성인이 있도다. 완재중앙지성인(宛在中央知性人)
*왕양 : 강물이 넓게 흐르는 모양, 현재와 같이 제방을 쌓기 전 일대는 바다처럼 넓었을 것
이다.
사수마을을 마을을 철거하고 택지를 개발하고 있다.
맺는 말
‘서호병 10곡’은 다사지역 주민들이 만든 <다사향토지>나 달성군이 전문가에 의뢰해 편찬한 <달성군지>에도 공개된 바 없는 귀중한 자료다.
글쓴이 도석규의 아호는 서호(西湖) 또는 금남(錦南)이다. 1773년(영조 49)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 때 생모, 다음 날은 부친, 그 다음 날은 생가조모와 조모 상을 당하니 3일 만에 네 번 초상을 치르는 불행을 겪었다.
이런 가정형편 때문에 늦게 아우 면규(冕珪)와 함께 임란 시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의 후손인 유심춘(柳尋春)에게 글을 배우니 학생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이 후 이락당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1809년(순조 9) 증광회시(增廣會試) 즉 나라에서 경사가 있을 때 보이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문장을 잘 지어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해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죽헌 도신징의 문집을 간행했다. 만년 가세가 급격히 나빠져서 오동(梧洞)으로 옮겼다. 1837년(헌종 3)돌아가시니 향년 65세였다. 저서로 <가례편고> ,서호애록(西湖哀錄)> <해동군원록> 등이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200여 년이 지난 오늘 날 현장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와룡산’ ‘선사’ ‘관어대’ ‘동산’ ‘이락서당’ 5곳은 그 나마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는 것 같으나, ‘부강정’ ‘가지암’ ‘사수빈’ ‘은행정’ 4곳은 흔적도 없다. 또한 이강서원 1곳은 최근 복원되고 서원 앞까지 임도를 잘 닦아 놓았으나 가로수 수종이 하필이면 의병장을 지낸 낙재 서사원선생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벚나무라 아쉬웠다.
<금호강종합개발계획>에 서호의 십곡 중 부강정, 은행정등 복원이 가능한 일부분이라도 반영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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