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집성촌]부림 홍씨 250가구 거주 한밤마을(군위 부계면 대율리)

이정웅 2009. 5. 21. 20:04
[집성촌]부림 홍씨 250가구 거주 한밤마을(군위 부계면 대율리)
굽이굽이 팔공산 한티재를 넘어 도착한 군위 부계면 대율리 한밤마을. 기자가 찾았을 때 마침 마을행사 준비로 한창 시끌벅적했다. 매년 5월 13일은 부림 홍씨들이 모여 ‘홍천뢰 장군’을 기리는 추모식을 여는 날이었다. 도시에서 찾아온 부림 홍씨 후손들뿐 아니라 군청 관계자 등 200여명이 추모비 앞에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평생 이 마을을 지키며 질긴 연(緣)을 놓지 않고 있는 부림 홍씨 27대손 홍갑근(65)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마을은 부림 홍씨가 1천년 가까이 세(勢)를 잡고 있는 집성촌이다. 조선 말기 한창 마을이 번창할 땐 300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현재도 부림 홍씨 25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집성촌 가운데서도 유구한 역사와 여전히 큰 세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은 고려 중엽 재상 ‘홍란’(부림 홍씨 시조)이 터를 잡으면서 부림 홍씨 집성촌으로 발전했다고 전하지만 묘를 찾지 못해 후손들은 9대손인 ‘홍로’를 입향조(入鄕祖)로 모시고 있다.

부림 홍씨의 자랑은 뭐니 뭐니 해도 홍천뢰 장군이다. 대율초등학교 앞에 우뚝 세워진 ‘송강 홍천뢰 장군 추모비’가 그 명성을 말해주는 듯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은 부산을 단숨에 함락할 기세로 영천성에 도달했을 때였다. 홍 장군은 그때 의병 2천명과 함께 신녕전투에서 기세등등하던 왜군을 대격파한 것. 홍씨는 “홍 장군은 당시 조정에 보고된 것보다 훨씬 많은 공을 세웠지만 원래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5m는 족히 넘는 이 추모비는 1972년 제작된 것으로 제자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

추모비 주변의 대율리 숲에 여기저기 쏟아져 있는 소나무들이 범상치 않다. 3천300㎡이 넘는 숲을 채운 수백년 된 소나무들로 풍광이 그림 같다. 홍씨는 “소나무들이 심겨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홍천뢰 장군이 이곳에서 의병을 훈련하면서 여름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이 숲은 예전에 성(城)이 자리하고 있어 ‘성 안’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숲 한가운데 자리한 석탑 기단도 눈길을 끈다. 팔공산 골짜기에서 발굴한 것으로 원래는 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었는데 15년 전쯤에 탑 윗부분을 도굴 당해 지금은 기단만 남아있다는 것.

홍씨와 함께 마을을 살포시 걸었다. 마을 길을 사이에 두고 이 마을의 명물인 돌담이 쭉 이어졌다. 마을 전체가 돌담 전시장처럼 보이는 이 마을 돌담은 1930년 대홍수 때 산사태로 떠내려 온 팔공산 계곡의 강돌을 이용해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엄청난 양의 돌을 버릴 수 없어 고민하던 중 자연스럽게 돌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돌담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홍씨는 말한다. “이 지역에 유독 돌이 많았어요. 집터를 만들려고 터를 파니까 계속 돌이 나와 담을 쌓다 보니 돌담이 만들어졌죠. 재질이 화강암이라 제주도 돌담처럼 잘 쌓으면 오랫동안 지탱해요. 마을 안에는 1천년이 넘는 돌담도 많아요.”

마을 중심부엔 조선시대 전통 가옥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매댁(上梅宅) 또는 쌍백당(雙栢堂)으로 불리는 이 전통가옥은 250년 전 건립 당시 의흥현(義興縣) 최고의 가옥으로 남촌(南川)고택으로 불리기도 한다. 13년 전에 이 집에 들어왔다는 홍석규(53)씨는 막내인데도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대구에서 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건립된 대청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고, 그 후 효종과 숙종 때 각각 수리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현재의 건물은 1632년에 중창돼 학사로 사용돼 왔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작성일: 2009년 0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