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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휙 그은듯 드리워진 곡선…볼수록 청초하다 타고 난 성품대로 스스로를 부리며 그 어떤 시샘도 그 어떤 견줌도 없다 꽃으로 피어 말없이 자족하는 꽃. 그뿐이었다
꽃들이며 들풀에 눈이 한 번 휘둥그레진 후 폐부로 신선한 바람이 들랑거림을 느낀 것은 거의 동시였다. 김춘수의 '꽃'을 읊은 것도 그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을/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눈짓. 그러고 보니 들꽃들은 눈짓이 한창이었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는 듯 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이름으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속삭임으로. 그런 그들은 볼수록 청초하다. 때로는 고혹적이다. 타고 난 성품대로 스스로를 부리며 그 어떤 시샘이나 다른 것과의 견줌도 없다. 꽃으로 피어 말없이 자족하는 꽃. 그뿐이었다. 소로는 '일기'에서 "꽃의 매력의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라고 했다. 인간이 결코 닮을 수 없는 침묵. 꽃의 침묵. 간디는 한 때 월요일을 침묵의 날로 정해 그 날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들꽃들은 월요일이 아니라 바람이 없는 날은 내내 침묵한다. 바람 불면 그저 흔들거리며 살랑일 뿐. 그 또한 침묵이 아니라고 그대 고집할 텐가. 많은 이들이 이미 꽃들에 어울리는 이름들을 불러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작 '몸짓'이었다. 상대를 매료시키는 '몸짓'이었다. 진정한 '눈짓'은 아니었다. 이름 있다고 모두가 행복할까. 터무니없는 이름도 얼마나 많다고. 험악한 세상에. 꽃 이름도 실은 부지기수다. 그러다가 혹여 '박연차꽃'이라도 있는 날이면 어쩔까. 지겹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그렇게 많이들 불리고 있으니. '신대법관꽃'이라는 꽃도 아직은 없다. 아직 없는 것만으로도 큰 다행으로 여겨야 하다니. 그렇다고 너무 이름에 힘겨워 할 필요는 없다. 시성 두보(杜甫)도 "아무리 천추만세에 이름이 남을지라도 죽고 나면 적막할 뿐(千秋萬歲名 寂寞身後事)"이라고 하질 않았는가. 부질없는 이름들. 회장인들 어떠하리 또 대법관인들 어쩌란 말인가. 찔레꽃. 한창 피어나는 하얀 꽃잎들. 이럴 때는 장사익의 구성진 가락을 마다할 리 없다. "하얀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그러나 한흑구는 '5월의 중앙선'에서 찔레꽃을 "신부가 한 아름 안고 있는 듯이 새틋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이다"로 묘사했다. 팔공산 자락의 찔레꽃에 코를 줘버린 박금희씨도 "어릴 때 배고프면 따 먹던 꽃"이라며 아스라한 기억에 뭉클해한다. 붓꽃이 보인다. 파랗기도 하고 자줏빛 같기도 하다. 꽃을 받친 줄기의 그 선이 너무 우아하다. 곡선. 어느 꽃인들 곡선 아닌 꽃이 있으랴. 그냥 휙 하늘로 그은 듯 드리워진 줄기의 그 곡선과 가녀린 꽃잎이 어울려 가뜩이나 가득한 기품에 또 다른 기품을 더한다. 그 곁에는 초롱꽃. 연한 줄기에 매달려 가지런히 초롱 밝히듯 아래로 향한 너의 의지는 무엇인가. 곡선으로 빚은 아래로 향한 숭고한 의지. 베르그송은 사람의 의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위로 올라가는 의지와 아래로 내려가려는 의지. 도대체 아래로 내려가려는 의지는 무엇일까. 초롱꽃이 대신 해답을 주는 것일까. 사람 사이에도, 특히 아래로 내려가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초롱꽃이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필 수 있을까. 최두석의 시에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가 있다. 그 첫 연이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 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그렇다 무슨 꽃인들 어떠랴. 나름대로 깔이 있고 내음이 있으면 됐지. 그게 웃음이고 그게 노래 아닌가. 사람들 사이에 말이다. 하이데커의 말대로 그런 사람들은 죄다 '던져진 존재' 아닌가. 세상으로. 그렇다면 그 사람들 사이에도 꽃은 얼마든지 필 수 있다. 만발할 수 있다. 들꽃으로. 솜양지꽃은 이미 볼 수가 없고 끝물인 할미꽃의 고개가 오늘 따라 더 무거워 보인다. 다른 할미꽃들은 다들 어디론가 갔건만 무슨 미련 때문에 여태 내치지 못하고 저렇게 처져 혼자 힘든 모습일까. 애기똥풀도 질세라 시들해진 금빛 꽃잎이 측은하다. 그러나 종글종글 환하게 금낭화가 막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딱지꽃도 흐드러지면 봄은 여름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앉아 알록제비꽃과 물레나물의 그 곡선 좋은 꽃잎과 줄기에 자리를 물려주리라. 그러면 까치수염이 이삭 모양으로 하얗게 모여 꽃이 피면 그 꽃줄기는 조 이삭 수그리듯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리라. 그리고는 참나리, 땅나리, 원추리, 은방울꽃이 들판을 채울 때 이미 물러나는 꽃들은 노래를 부르리. 신동엽이 지은 노래를 부르리. '너에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터/ 새 순 돋듯// 허구 많은 자연 중/ 너는 이 근처와 살아라". 결코 그럴 수는 없지만 한마디 덧붙인다면. 너가 와서 산다면 제발 '곡선으로' |
/글·사진=김채한 객원기자 namukch@hanmail.net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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