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이당 묘 也字形 대길지, 友情으로 더 빛나다 | ||||||||||||||||
고려 말 공민왕 시대에 이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시기는 신돈(辛旽)이란 승려가 국정을 전횡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집은 어느 날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게 된다. 이 말이 신돈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화를 피해 늙으신 아버지를 등에 업고 천리 길 피난길에 오른다. 천리 밖 영천 땅엔 과거 동기생인 최원도(崔元道)란 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신돈의 전횡을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낙향해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친구 집에 도착한 이집, 하지만 그는 친구에게서 문전박대를 당한다. 잔칫날 집 주인은 반기기는커녕 되레 호통을 치고 내쫓았던 것. 그러나 친구를 믿었던 그는 집 근처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이윽고 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 주인은 등불을 들고 그를 찾아 나선다. 그의 예상대로 친구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박대를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집은 이곳에서 몇 년간 힘든 은신생활을 하게 된다. 최원도는 가족들도 모르게 이집 부자의 은신생활을 돌본다. 세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밥도 그득하게, 반찬도 넉넉하게끔 하인들에게 주문을 한다. 그렇게 가져온 밥상은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계속되는 이런 생활에 연아(燕娥)라는 하녀가 이상하게 여기게 된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몰래 이 광경을 엿보게 된다. 그녀는 결국 안방마님에게 이 사실을 말하게 됐고, 그 말은 다시 최원도의 귀에 들어오게 된다.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그는 엄하게 함구령을 내린다. 연아는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결국 자결을 하고 만다. 그 후 영천지역에도 수색령이 내리게 되나, 잔칫날 거짓 행동으로 그들은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는다. 영천으로 피난 온 다음해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서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피신하는 신세라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고 장사도 은밀히 치러야 했다. 하지만 친구는 자기 수의(壽衣)까지 내주며 정성을 다해 장사를 치른다. 묘 터도 자기가 묻힐 곳으로 정했던 곳, 자신의 어머니가 묻힌 자리 밑이다. 이게 이당 묘 위쪽에 영천이씨의 묘가 있게 된 연유다. 이당 묘는 야자형(也字形)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국세에선 특히 백호의 발달이 탁월하다. 천자문 끝 글자인 야자는 마지막 획순이 백호가 된다. 백호가 길게 뻗어 청룡의 아래턱까지 감싸고 있다. 수구가 꽉 조인 형태다. 반면에 청룡은 짧고 낮게 묘를 감싸고 있다. 이당 묘는 횡룡으로 결혈되었다. 산줄기 옆쪽으로 다시 가지를 내고, 그곳에 혈이 맺힌 것이 횡룡결혈이다. 횡룡결혈의 특징 중 하나가 보국 형성이 잘 된다는 것이다. 이 묘에서 보면 주위의 산세가 모두 이곳을 향해 둘러싸고 있다. 물도 왼쪽으로 튼 산에 대하여, 오른쪽에서 나와 묘 앞을 돌아나가니 귀한 물이 된다. 산과 물의 조화다. 주위엔 귀봉사(貴峰砂) 부봉사(富峰砂) 천마사(天馬砂) 등이 즐비하니 사격(砂格)도 훌륭하다. 후덕한 혈장에 용맥의 기복(起伏) 속기(束氣)도 좋다. 혈증(穴證)이 다소 부족한 것에 아쉬운 감은 있지만 이는 오랜 세월이 스쳐간 흔적으로 봐도 되겠다. 이당 묘는 생사(生死)를 넘나든, 친구 간의 참되고 아름다운 우정의 결실이라 하겠다.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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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08월 0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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