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은해사 큰 절 자체에는 이렇다 할 불교문화재가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1847년 대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한 1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당시 주지였던 혼허(混虛)스님이 3년여의 불사(佛事)를 일으켜 오늘날까지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은해사에는 뜻밖의 문화재가 생겼으니 그것은 추사의 현판 글씨이다.
혼허 스님은 새 법당에 걸 현판 글씨를 모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추사 김정희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문루의 '은해사' 현판은 물론이고, 불전의 '대웅전(大雄殿)', 종루의 '보화루(寶華樓)', 조실스님의 거처인 '시홀방장(十笏方丈)', 다실인 '일로향각(一爐香閣)', 백흥암에 있는 여섯 폭 주련(柱聯), 그리고 추사 글씨 중 최대작이라 할 '불광(佛光)' 모두가 추사의 작품이다.
특히 은해사의 현판은 추사체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작이 된다. 당시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용산 한강변[江上], 마루도 없는 집에서 간고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추사체는 바로 이때 완성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은해사 추사 현판 중 특히 '大雄殿' 글씨는 강철 조각을 오려놓은 듯한 추사체의 전형이다. 박규수의 평대로 "기(氣)가 오는 듯, 신(神)이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드는 듯"한 감동이 일어난다. 눈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반가워했다.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제자인 이학래(李鶴來)는 영천군수가 되자 은해사를 찾아와 한차례 이 현판들을 보고 놀라웠다고 했다. 또 최완수 선생은 "무르익을 대로 익어 필획의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 없다"고 했다. 은해사는 가히 추사 글씨의 야외전시장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