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박씨 영덕 종택 덕후루
덕후루 전경
얼마 전 문희갑 전 시장을 뵈올 기회가 있었다. 인흥마을의 명소 광거당에 앉아 최근 대구시의 녹지행정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중 영덕군 창수면에 있는 무안박씨 종택을 가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하였더니 그 집에 수령이 800여 년이 된 큰 소나무가 일품이더라고 하셨다. 나는 눈이 번쩍 띄었다. 대구, 경북의 명목을 찾아다니는 나로서는 또 다른 귀중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시(市)에 있는 한영기, 김형일 사무관과 인력개발원 이대영님과 함께 영덕 창수를 향했다. 그날따라 간간히 비가 내렸다. 영덕에서도 오지로 알려진 창수 그 곳에서도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들어간 곳이었다. 아무리 산수가 좋기로서니 이런 오지에 터를 잡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커다란 집한 채와 외딴 데 떨어진 비각이 전부였다.
입향조는 무의공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이다. 본관이 무안으로 현감 세렴의 아들이다.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며 경사(經史)에도 밝았다.
1577년(선조 10)무과에 급제하여 주부가 되고, 1588년 진해현감을 거쳐
무의공 박의장의 신도비각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판관이 되었다. 이때 소속군사를 이끌고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동래성을 구하기 위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이각이 퇴각하자 그의 비겁함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같은해 7월에 이각이 처형되고 박진(朴晉)이 병마절도사로 파견되자, 장기군수 이수일(李守一)과 함께 박진을 도와 적에게 빼앗긴 경주성의 탈환작전에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 4월에는 군사 300여명을 거느리고 대구 파잠(巴岑)에서 왜적 2, 000여명을 만나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빼앗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5월에도 울산군수 김태허(金太虛)와 함께 울산의 적을 쳐서 50여명을 베는 등 크게 이겼다. 그러한 공으로 당상관으로 특진되면서 경주부윤이 되었다.
7월에는 초산군(剿山郡)의 적을 쳐서 남문에서 전멸시켰다.
8월에는 왜병이 안강(安康)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의 군사를 급습하여 200명을 죽이자 병사 고언백(高彦伯)과 함께 적을 추격하여 무찔렀다.
1594년 2월 양산의 적을 무찔렀고, 3월에는 임랑포(林浪浦)의 적이 언양현에 진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이를 급습하여 무찔렀다.
이때 적에게 잡혀 있던 백성 370명을 구해냈으며 우마 32필도 노획하였다.
덕후루 현판
5월에는 기장(機張)에서, 7월에는 경주에서 많은 왜병을 베었다. 1595년에 그 공으로 가선(嘉善)으로 승품되고, 1597년 영천과 안강의 적을 무찔렀다.
이때 1, 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명군 5만 명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적군이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치자 창고에 있던 곡식 400여석을 거두었다.
1598년 박도산(薄島山)의 적을 쳐서 전승을 올려, 가의(嘉義)에 승품되고 말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성주목사 겸 방어사가 되고, 1600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이듬해 인동부사(仁同府使), 1602년에 다시 경상좌병사 및 공홍도수사(公洪道水使)를 거쳐 경상수사를 지냈다.
다섯 차례의 병사를 지내는 동안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같았다.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영해의 정충사(貞忠祠)와 구봉정사(九峯精舍)에 제향 되었다.
비록 소나무는 보지 못했지만 훌륭한 분을 뵐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공이 1593년 4월 임란 발발 이듬해 대구의 파잠 즉 파동에서 군사 300명을 이끌고 아군 일곱 배에 해당하는 왜적 2,000명과 싸워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뺏은 전과는 대구지역 임란 사에는 없는 귀중한 사료를 얻을 수 있었다.
창수면 수리 454번지에 있는 덕후루는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이다. 관리인이 없었을 뿐 아니라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구경할 수 없었다.
무안(務安)은 전라남도 무안군으로 백제 때 물아혜군(勿阿兮郡)이라 불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무안군(務安郡)으로 개칭하였고 함풍(咸豊)·다기(多岐)·해제(海際)·진도(珍島) 등의 영현(領縣)을 관할하였다. 944년(고려 혜종 1) 물량군(勿良郡)으로 고쳤으며, 991(성종 10)에는 다시 무안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나주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고, 1391년(공양왕 3)에는 성산극포권농방어사(城山極浦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무안현으로 개편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면천(綿川)·면성(綿城)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군이 되었으며 1897년 무안부(務安府)로 승격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목포부(木浦府)를 독립시키고 나머지 지방은 무안군이 되었다. 1957년에 면성면이 무안면으로 개칭되고, 1979년 무안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에 일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 망운면 운남출장소가 운남면으로 승격하였다.
무안박씨(務安朴氏)의 시조 박진승(朴進昇)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여섯째 아들인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의 5세손으로 고려시대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공을 세워 무안(務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무안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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