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사 대웅전 최근새로 지은 것이다
선덕여왕의 영정을 봉안해 놓은 숭모전
신라시대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축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이 생애의 마지막 4년을 대구의 팔공산 부인사(夫人寺)에 유폐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단국대학교 김용희 교수는 그의 저서<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2009 다산초당>에서 647년(진덕여왕 1)부터 651년(진덕여왕 5)까지 약 4년 동안 선덕여왕이 이곳 부인사에서 쓸쓸하게 보내다가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중국의 사서<자치통감>를 예로 들었다. 주변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이 책에서 선덕여왕이 651년(진덕여왕 5)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드라마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신라 최초로 여왕 선덕(재위기간632~647)은 집권 기간이 비록 15년에 그쳤지만 그 기간을 통하여 자장율사 등으로 하여금 신라인을 불자로 만들어 국론을 통일하게 함으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 불린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어렵게 집권한 여왕은 재위 5년(636) 백제 장군 우소가 군사 500명을 이끌고 여근곡에 잠복하고 있는 것을 장군 알천(閼川)으로 하여금 섬멸케 하고, 7년(638)에는 북단의 요충지 칠중성(지금의 경기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일원 사적 제437호)을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역시 물리치는 등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수행해 나아갔다. 그러나 집권후반기인 재위 11년(642) 백제 의자왕에게 40여 성(城)을 빼앗겼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작전에 의해 당과의 통로인 당항성(唐項城, 지금의 경기 화성시 서면 사적 제217호)을, 같은 달 백제 장군 윤충에게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빼앗기는 등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당태종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여자가 왕이 되어 그렇다며 도움은커녕 조롱만 받았다. 재위 13년(644) 김유신으로 하여금 백제에 빼앗겼던 성을 되찾고 이듬해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략하기 지원을 요청하자 원군 3만 명을 보내 도왔으나 백제에게 다시 7성을 빼앗기는 등 정세가 혼란해진다. 재위 15년(647)마침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킨다. 주모자가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인만큼 추종세력이 많고 명활산성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사태진압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김유신장군이 선봉에 서서 10여 일 만에 제압하고 비담 등 주모자를 잡아 9족을 처형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여왕이 돌아가셨다.
김교수는 이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선덕여왕이 살해되었는지 감금되었는지, 자연사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고, 김춘추와 김유신이 느닷없이 사촌인 진덕을 왕위에 앉힌 점, 또한 오래 전부터 부인사에 선덕여왕을 모시는 숭모전을 따로 두고 해 마다 여왕을 기리는 선덕제(善德祭)를 올리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부인사는 현재 부인사(夫人寺)로 부르고 있으나, 다른 이름으로는 부인사(符仁寺)라고도 한다. 병란 등으로 기록이 인멸되어 자세한 창건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최근 경북대학교 문경현 교수가 쓴 사적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재위 13년(644)삼국통일을 기원하고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지었다고 한다.
이런 왕실과 깊은 인연 때문인지 전성기에는 39동의 당우와 부속암자에 2,000여 명의 스님들이 수도하는 대가람이었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시(僧市, 스님들의 일용품을 사고파는 장)가 열렸으며, 부처님의 가피(加被)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1011년부터 1078년까지 무려 반세기 이상에 걸쳐 고려국민의 정성으로 만든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1132년(인종 10)당시 수도였던 개경의 덕적산 흥왕사로부터 먼 이곳에 봉안되었다. 지금의 해인사 팔만대장경보다 판각(板刻)의 기술도 뛰어나고, 무려 200여 년 앞서 만들어진 이 장경(藏經)이 1232년(고종 19) 몽고군의 2차 침입 때 불타버리고 만다.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이규보, )는 그의 글 <대장경판각군신기고문>에서 불타버린 이 장경에 대해 잃어버린 감회를 다음과 같이 슬퍼했다.
‘심 하도다 몽고의 침략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凶暴)한 성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인데 심지어 어리석고 아둔함 또한 짐승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가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이 있음을 짐작하겠습니까. 때문에 지나는 곳마다 불상과 범서를 태워 없애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이에 .부인사에 갈무리했던 대장경판본도 남김없이 쓸어버렸으니 아! 여러 해 쌓은 공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나라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011년 개최할 세계육상선권대회를 앞둔 대구시에서는 천 년 전에 있었던 이 국책사업을 현실에 맞게 재현하여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현재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중에 있다 이런 점에서 선덕여왕이 유폐(幽閉)된 이야기까지 곁들여 진다면 천년고찰 부인사는 더 많은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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