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대구성(大邱城)의 가치

이정웅 2010. 1. 12. 19:51

대구성(大邱城)의 가치
 
 
 
103년 전만 해도 대구는 성곽도시였다. 국내 최대 평지 성곽이었던 ‘대구성’ 이후 주목할 만한 성곽 건설이 없었기 때문에 60년 뒤에 지어진 수원 화성의 모델이 되었다는 개연성이 생긴다. 화성 축조의 주역이었던 정약용에게 건네진 중국의 병서 ‘무비지’(武備志)를 영조대왕의 지시로 대구성을 축조했던 경상감사 민응수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번역했다는 사실은 귀를 더 솔깃하게 만든다. 대구성은 ‘화성축성의궤’처럼 국가가 펴낸 문헌은 없지만, 경상감영이 있었기 때문에 동래성 보고서인 ‘축성등록’이나, 전주성 보고서인 ‘축성계초’ 같은 문헌이 있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성제(城制)를 망라한 완벽한 성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구성은 세 가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실학 사상이 담긴 축성, 나라 경제를 생각한 축성, 백성의 살림을 배려한 축성이 그것이다. 대구성은 실학의 태두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았고, 개혁 군주였던 영조를 받드는 탕평파 세 남자가 책임감을 갖고 쌓았다. 축성의 주인공은 민응수였지만, 축성을 제안한 인물은 민응수의 전임 조현명이었다. 그는 전주성을 쌓으면서 남긴 ‘축성계초’로 이론의 근거를 제시했으며, 이후 남한산성이 축성될 때도 주도적 역할을 한 전문가였다. 특히 전주성 축조 때는 동차(童車)를 개발해 공기를 단축하는 등 과학적 축성법을 사용했다.

또 다른 가치는 자금 조달의 모범답안이랄 수 있는 ‘요판이취’(料瓣利取`상황을 보고 이익을 취함)로 관의 예산을 쓰지 않고 자금을 자체 조달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방법은 60년 후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밝힌 ‘판재지법’(瓣財之法)의 모태가 된다. 백성 된 의무를 알리고, 화합으로 참여를 유도했다는 점도 눈에 띄며, 무너진 기왕의 토성들에서 나온 자재들을 재활용하여 경제 효과와 생산성을 높인 점도 놀랍다. 소외계층도 동참시켰다. 100패(牌)로 나눈 조직으로 기민구제방식을 채택, 승려와 죄수들까지도 건설 현장에서 한마음이 되어 땀흘렸다. 농한기를 이용하여 민생이 힘들지 않게 최단기간(5개월)에 축성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오랫동안 대구성을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와, 문화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대구가 ‘성곽도시’의 일원으로 세계문화도시의 반열에 올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심포지엄이나 공청회 같은 것이라도 열었으면 좋겠다. 위대한 문화 콘텐츠는 그런 노력들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경주읍성’이 복원된다는 소식에 놀라서가 아니라, 더 이상 사라진 안타까움과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으로만 우리 문화를 이해하지 말자는 얘기다.

김정학 천마아트센터 총감독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2010년 01월 12일 -